[Opinion] 이반 일리치의 죽음 - 나의 죽음에는 공감이 필요하다. [문학]

글 입력 2017.03.2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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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죽는다면 어떨까 상상하곤 한다. 사실 죽음 그 비슷한 것도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지도 않고, 그래서 별다른 감정도 못 느끼겠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모두 끝나 버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슬픔이나 후회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다만 정말 참을 수 없게 괴로운 것은, 나의 존재를 잃어버린 내 주변의 사람들, 나의 가족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미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전에 내 눈앞에 떠오르는 그들의 표정은 항상 이런 생각이 들게 한다.


'나는 아직 죽어선 안 되겠구나. 나는 살아야겠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죽음을 생각할 때, 그 누구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나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고, 내가 겪었을 고통에 공감해 주지 못한다면 내겐 살아갈 원동력이 없을 것이다. ‘나 하나 없어진다고 해도 세상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찬 순간, 나는 내가 살아온 삶 속에서 맺은 관계들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충격적일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방 안에 모인 신사들의 동료였고 모두 그를 좋아했다. 그는 벌써 몇 주째 와병 중이었는데 고치기 어려운 병이라고 했다. 그의 자리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가 사망할 경우 알렉세예프가 그 자리를 승계하고, 알렉세예프의 자리는 빈니코프나 슈타벨이 승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때문에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집무실에 모인 신사들의 머리에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은 이 죽음이 자신 또는 자신이 아는 이들의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어떠한 의미를 갖느냐는 것이었다.

-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처음부터,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은 죽음으로써 등장한다. 그것도 사람들이 진심으로 생각해 주지 않는 죽음으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반 일리치를 ‘좋아’한다는 방 안의 모든 신사들은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마자 자신에게 돌아갈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 한 사람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그 사람 자체, 그 사람이 살아온 일생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익을 판단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것이다. 삶 속에서 맺어 온 관계들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충격적인 순간이다.

  사람들은 아무도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알려고 들지 않는다. 물론 그를 동정하지도 않는다. 그건 그들이 이반 일리치와 다르다는 생각, 그들은 아직 젊으며 죽음과 상관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나’, ‘내가 바라본 나’의 관점에서 그들은 아직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이르다. 이는 이반 일리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젊고, 생기 넘치며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던 그 역시 그가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로소 죽음이 닥쳐온 그 순간에야,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진정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간극은, 모든 것이 가식이고 위선인 곳에서는 어쩌면 당연하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지만, 그 사람들은 항상 나만을 위한 것이다. 가령 그들은 나중에 내게 도움을 줄 사람들이거나, 지금 나의 위신을 높여 줄 사람들이다. 이반 일리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들과 소통하지는 않았다. 그의 관계에서는 진심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심지어 가장 가까워야 할 그의 가족에게도 그는 적절한 무관심으로 일관할 정도였으니 그는 사실상 어떠한 곳에서도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그 스스로를 소외시키면서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죽기 전 그는 ‘네가 살아오면서 추구한 것은 죄다 거짓이고 사기야. 그게 네 눈을 가려 삶과 죽음을 못 보게 한 거야.’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인정하기 싫은 깨달음에 마주하면서 커져가던 두려움은 죽음을 통해 막을 내리고, 이반 일리치는 자신을 거짓된 관계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은 카프카의 「변신」에서 나타난 그레고르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변신」에서의 주인공 역시 비로소 죽음이 눈앞에 보여야 사실을 자각하고, 자기 자신을 놓아줄 수 있었다. 한순간에 벌레로 변해 버린 주인공은, 자신이 벌레로 변하게 되자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깨닫는다. ‘가족들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주인공은 오히려 벌레가 되었을 때 더 자유로웠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그를 지배하던 의무감, 그를 옥죄던 가식과 거짓을 모두 끊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비단 이반 일리치와 「변신」의 그레고르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하듯이, 현대인들은 정말 많은 사람들과 같은 공간 안에 숨쉬고 있지만 정작 스스로 고립되어 있다. 자신을 조금 더 높은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들만 늘어놓는 사회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어려워진 것이다. 모순적으로 현대 사회의 소통수단은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다른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피상적이다. 누구를 ‘이해’ 한다기보다는 나를 조금 더 드러내고, 나의 모습을 통해 얻는 나 자신의 만족감이 주 목적이지, 사실상 소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게 진정으로 공감해주고, 나의 처지에 동정해 줄 수 있는 관계들을, 현대 사회는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나’의 죽음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얕은 관계 속,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나의 죽음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어쩌면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두려움에 몸부림칠 때 그 답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편했던 자신의 삶 중 최고의 순간들을 더듬기 시작하면서, 아주 어린 시절의 편안함을 먼저 떠올린다. 또 법학교에서 생활할 당시의 즐거움, 우정, 희망 같은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은 한 여성에 대한 사랑을 회상하는 것, 결혼 전의 순간이었다. 그 외의 그가 최고라고 생각했던 현재 자신을 만든 순간들, 그가 기쁘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은 모두 부질없었다.

   이반 일리치가 마침내 깨달은 최고의 순간들은 무언가의 시작에서 비롯된 순수한 감정들이었다. 어린 시절, 학교생활의 시작, 사랑의 시작에서 그는 행복할 수 있었다. 곧 거짓과 가식이 없는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들. 그 감정들의 회복이 일어나야만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들 역시 나에게 공감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며 살아가려 한다.

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에는 공감이 없었다. 그는 죽음으로써, 자신을 모두 내려놓고 외쳤던 것이다. 나를 조금 봐 달라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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