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해서 아름다운

글 입력 2017.02.2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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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명실」

사랑을 표현하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는 서로가 서로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자신을 누군가의 애인으로 소개하거나, 프로필 사진을 애인의 사진으로 바꾸거나, 넌 나고 난 너야라고 노래를 부르거나. 황정은의 「명실」은 애인과 사별하면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의 폐쇄적인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명실, 그녀는 자신이 노쇠함을 조카들의 말랑한 살에 대한 기억을 통해 인지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다 커버린 조카가 자신을 이모라고 부름으로써 규정하는 자신의 정체성은 부정한다. 그녀의 오랜 시간의 독거 생활 속 배경이었던 찬장과 책장, 책상과 의자처럼, 그녀의 시간은 젊은 시절에 멈춰있다. 이는 명실아, 이렇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젊은 실리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 때문이다. 실리가 그렇게 그녀를 부름으로써 그녀는 그녀가 될 수 있었다. 그녀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머뭇거리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그녀의 오랜 그리움은 그녀를 실리의 글과 닮게 만들었다. 실리는 글을 써도 시작만 할 뿐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써 보아야 결국 죽은 이후 재회에 대한 이야기다.(실리가 던져버린 소설 몇 장에는 자신이 생각하기 싫은 결말이 있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실리처럼 그녀는 하려고 했던 것을 시작하다가 자꾸 잊어버려 다시 시작하고, 노트에 적을 내용에 대해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까’를 중얼거리다가 실리에 대한 생각에 잠기기를 반복한다. 이들 둘에게 서로의 관계의 끝, 마지막은 부정하거나 회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녀는 더 나아가 실리의 부재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 사진을 보며 생전의 실리를 고스란히 느꼈고 실리가 부서져 사진에 깃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자기기만이 약해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사진을 보지 않는다. 이제 죽어서 ‘아무도 아닌’ 실리가 사진으로라도 부활할 수 없다. 존재한다고 믿으면 그게 눈이든 코든 이마든 ‘무언가’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정말 망각의 바다에 잠겨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까봐 그녀는 두렵다. 그 누구도 실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명실은 실리의 존재의 결핍을 알면서도 부정하고, 이것이 의미의 결핍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슬프게 몸부림친다. 바닷물에 빠지며 실리가 보았을 짙은 어둠을 헤매듯 망상과 추억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그녀는 결국 실리를 만나러 간다. 그녀는 죽음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심해의 어둠을 갈라내고 싶어서 실리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가진 만년필을 잡는다. 창문 가까이로 옮겨 잘 볼 수 있고 또 잘 보일 수 있는, 그래서 실리의 시선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책상에 앉는다. 돌아오지 않는 애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대상도 없이 그저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을 이해하며 시선의 주체이자 객체가 될 준비를 한다. 이것은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행위이자 지평선을 만들어 실리의 기다림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다. 망각의 공포와 환각의 혼돈 같은 그녀의 세계에 구멍을 뚫고 길을 내면서 구분 짓는 즉, 질서의 상태를 만드는 의식인 셈이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거나 아니면 외부와 있는 그대로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새벽 혹은 저녁의 이미지로 잘 그려지고 있다. 그러면서 그녀는 실리가 했을법한 행위를 자신이 한다고 단 한 권의 노트에 적으며 점점 자신과 실리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실리를 그리워하다 못해 실리 자체가 되려는 것 같다. 우리는 사후적으로 그녀에게 실리가 커다란 의미, 그녀 자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벌판에서 앉지도 못하고 서서 기다리던 실리와 만날 때, 그녀와 실리 모두 젊은 시절의 모습이길 빈다. ‘대부분 늦는’ 그녀를 만나 생에 못 다한 둘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도록. 글의 마지막을 쓰고도 도깨비처럼 눈언저리를 붉히지 않아도 되는, 죽음도 시간도 없는 세계에 살도록.
[나진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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