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른'에서 미끄러지기 [문화전반]

눈이 와도 설레지 않는 당신에게, 그림책을.
글 입력 2017.01.24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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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Jean-Jacques Sempé

 
 몇일 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눈이 내렸다. 얼어버린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발끝에 잔뜩 힘을 준 채 걸었다. 어디쯤을 딛어야 무사할까하며 걸어가던 중, 앞서 가는 아이와 엄마가 보였다. 유치원엘 데려다주는지 엄마의 손엔 노란 유치원가방이 들려있었다. 아이는 옆에서 쉼없이 미끄러졌다. 엄마와 맞잡은 손을 지지대 삼아 '일부러' 미끄럼을 탔다. 엄마의 손에선 인내심이 닳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의 발돋움에 엄마까지 ‘미끌’, 중심을 잃을 뻔하자 그녀는 손을 놓곤 아이를 다그쳤다. ‘장난치지 말랬지!’ 매서운 다그침에도 아이의 눈은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어릴 땐 눈을 보면 왜 그렇게 설렜던걸까 생각했다. 나는 매번 지나는 이 길이 평탄할 것임을 절대 의심치않는다, 눈만 오지 않는다면. 이 길이 적당한 마찰력으로 나를 지탱해주리라, 10분이면 전철역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믿기에 안심한다, 눈만 오지 않는다면.  자칫 중심을 잃게 하는 그 미끄러움, 앞을 예측할 수 없게 하는 그런 미끄러움은 더 이상 즐거움일 수 없다. 나는 현실의 모든 인과관계를 알고(있다고 생각하고), 이곳의 게임규칙에 '미끄러움을 즐기는 것'이나 '눈을 보고 설레는 것'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미끄러움에 설레는 그런 나이는 이제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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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 Willems 의 그림책들

 저번 주엔 늘어난 책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 책들을 한바탕 버려야겠다 싶었다. 그러다 한 켠에 쌓아둔 그림책 몇 권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책장을 가득채웠지만 이제는 7권 뿐이었다. 남은 것들도 버릴 때가 됐지.' '초딩'이 된 후, 작은 글씨와 양장본의 책을 읽는 것은 언제나 뿌듯한 일이었다. 자고로 어른스러움이란, 그림이 있는 책들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말이다. 훌륭하지만 어려운 것, 양장본의 책처럼 무게가 있는 것, 그래서 함부로 미끄러지지 않는 것, 그것이 '어른'다운 것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아이의 특징'은 하나의 능력이 아닌 '미성숙의 증거'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어른이 되며 무엇인가를 잃었음에 슬퍼하기보단 나는 성숙했음에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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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Jacques Sempé


 그래놓고, 뭐가 아쉬워서 남은 그림책들을 못 버렸는지.  미간에 주름을 잡아가며 눈길을 걷는 내 모습에 나는 무엇인가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미성숙의 증거라 치부했던 그런 것, 오히려 어른이 된 나에게 필요해진 어떤 '능력'의 상실을. 현실의 모든 인과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 승패가 걸린 게임이 아닌 축제에만 어울리는 그런 능력 말이다.

 그림책을 읽을 때 나는 '어른'에서 잠시 멀어진다. 모든 그림책들의 커다란 그림과 자유분방한 이야기는 현실의 평탄한 길에서 '미끄러지게끔' 만든다. 그제서야 나의 무게를 느낀다. '어른'이 되고 얼마나 내 삶은 무거워졌는가를 느끼는 것이다. 조금은 즐거워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 더 자유로워도 괜찮지 않을까. 무엇엔가 홀린 듯 남은 그림책들을 펼쳐봤던 것은 오래 전 잃은 '능력'을 되찾아보려던 시도였던 것은 아닐까.





대표이미지: 'Pigeon And Pals Complete Cartoon Collection Vol. 1 & 2' by Mo Willems 


[이서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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