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원작을 읽다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문학]

글 입력 2017.01.16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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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유명한 작품입니다. 노인으로 태어나 나이가 들수록 젊어지며 결국 아이가 되어 죽는다는 참신한 발상은 대중의 흥미를 끌었고 각종 패러디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정작 이 작품을 영화로도 소설로도 접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제목과 소재에 대한 흥미, 딱 그 정도의 관심 뿐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기회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원작 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삶을 주제로 한 작품이니 저는 이 소설이 장편 소설이겠거니 짐작하고 있었는데, 사실 이건 단편 소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작자는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였고, 심지어 제목마저 ‘벤자민 버튼의 기묘한 사건(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으로 한국과는 달랐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건 제가 상상한 이야기와 실제 이야기의 구체적인 내용이었죠. 소설을 읽기 전, 저는 벤자민의 이야기가 희극일 줄 알았습니다만 실제로 그의 이야기는 비극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항상 주변에서 규정하는 ‘평범한’ 틀에 본인을 끼워맞춰야 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단 한 번도 본인이 본인일 수 없는 비극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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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은 남들과 다르게 태어났습니다. 무언가 남들과 크게 달라지는 지점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공포를 유발하지요. 비현실적인 그의 모습이 드문드문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진 이유입니다. 그러나 막상 들여다보면 나름의 삶을 잘 살다 간 벤자민의 삶을 비극으로 정의한 건 그에게 일종의 폭력이 될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이어야 한다며 틀 안에 가두는 폭력 말입니다.
 
여기서 저는 사람들에게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벤자민의 삶을 안타까워하고 있음에도 저 역시 그를 전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비정상적’인 벤자민의 삶을 현실성 있게 받아들이기 위해 그것이 비극이었다고 포장한 것이죠. 그러니 사실은 제가 그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조차 기만이었던 셈입니다.
 
때문에 이 이야기는 환상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입니다. 아마 소설 속에 사람들이 그를 긍정하는 모습이 그려졌다면 이 소설은 환상소설이 될 수 있었겠죠.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바라는 틀 안에서만 그를 받아들였으며, 그래서 이 이야기는 판타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식의 결말은 이 이야기에 존재하지 않았거든요. 


벤자민은 기억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먹었던 우유가 따듯했는지 차가웠는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잘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자신이 누워 있는 요람과 유모 나나의 존재만이 뚜렷했다. 그러다 결국 그는 그것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다. 배가 고프면 울고 하루 종일 숨 쉬는 일이 전부였다. 그 위로 알아듣기 힘든 중얼거림과 희미하게 다른 냄새들, 그리고 밝음과 어둠만이 있었다.


벤자민씨는 오히려 '행복하게 잘' 살다 갔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벤자민씨의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을 뿐, 그는 사랑도 해 보고 사회적 성취도 이뤄보았습니다. 그의 마지막에는 행복도 불행도 없었고, 그래서 그는 그저 자신의 삶 그대로를 끌어안은 채 간 사람일 뿐이죠.

하지만 사회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는 가장 일반적인 것을 모아 형성해놓은 틀로서, 사회의 통일성을 해치는 벤자민의 존재는 존재 자체로 사회에 위협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를 인정하는 순간 사회의 틀이 어긋나버리니까요. 그래서 작가는 작품 초반에 벤자민을 낳은 것을 50년이나 앞선 판단, 시대에 맞지 않는 선택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라고 벤자민은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저는 고개를 젓습니다.

벤자민씨의 삶 이전에나 이후에나 마찬가지로 사회는 한 사람의 삶에 평범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시간이란 건 모두에게 평등하고 그 변화는 모두가 다르게 겪는 것이 맞습니다. 결국 벤자민 씨의 삶 역시 자율성을 가지고 꾸민 나름의 삶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러니 오히려 '평범한' 시간이 늙어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라면, 사회의 시간이야말로 사실 거꾸로 가야 할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발전이라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을 테니까요.


[서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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