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당신의 인간관계는 어떠한가요-연극 '스프레이'

글 입력 2016.12.31 03:5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연극 <스프레이>

2016. 12. 23 ~ 12. 31
미아리고개 예술극장

원작 김경욱
연출 박정의
출연 이상희 김정아 이훈희 양신우 등
제작 극단 초인




스프레이_극단초인_포스터.jpg
  

  김경욱 작가의 희곡 <스프레이>를 원작으로 한 이번 연극에서, 지난 두산아트랩 및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소개된 바 있는 판소리 <여보세요>가 떠올랐다. 역시 김애란의 소설 ‘노크하지 않는 집’을 원작으로 하는 이 판소리는 고시원 1번 방에 살고 있는 여자와 건너건너 옆방에 살고 있는 얼굴 모를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고시원은 서로 포스트잇으로만 소통하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공용신발장에서 자신의 신발을 잃어버린 주인공은 옆집 사람을 의심하며 옆집 안을 몰래 들어가보기 시작한다. 철저히 개인의 공간을 분리한 벽, 누구도 마주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듯한 텅 빈 복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말 건넬 수조차 없는 이곳에서 청각은 가장 곤두서있는 감각이다.


 
78649ddf535adf8d1aaa262b057d4acc_5FmRp53oQP1Ra4QdrQ6bblY.jpg
 


  <스프레이> 또한 안락함과 무료함의 아파트 공간에서 일어나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이다. 옆집 여자가 출퇴근하며 문을 여닫는 소리, 아침마다 샤워하는 소리, 말다툼하는 소리까지. 벽 너머로 주인공의 귀에 무심결에 들려오는 소리들은 옆집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주인공은 이따금씩 옆집의 소음을 참지못하고 수화기를 들다, 남의 집 택배를 훔치는 것에 쾌감을 느끼게 되는 평범한 백화점 구두판매사원이다.
 
  사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SNS를 통해 남의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현실에서 얼굴을 보고 연락하지 않아도, 너와 나의 근황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손쉽게 지켜보고 구경하는 대상이 된다. 실제적인 접촉이나 왕래 없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몰래 관찰하며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스프레이> 속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옆집 여자의 샤워소리를 들으며 출근준비를 하고 백화점을 찾아온 손님들을 대하는 감정노동을 마친 후 집에 들어와, 귀를 틀어막고 혼자만의 휴식을 가지려는 그에게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감정적, 정서적 교류가 차단되고 본연의 감정이 억압된 그의 욕구를 해소해주는 것은 바로 남의 집 택배를 몰래 뜯어보기이다.


401352.png
 

  택배를 몰래 뜯어보며 이웃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병적인 인간관계는 그 자신의 콤플렉스인 ‘축축한 손’과도 관련 있다. 손에 흥건한 땀은 내가 남에게 보여주길 원치 않는 불안감과 초조함의 감정을 드러낸다. 감정을 드러내는 데 익숙지 않거나, 항상 자신의 감정을 숨겨온 주인공, 심지어 인터폰으로 옆집여자에게 시끄럽다 항의할 때조차 정중히 말하는 그가 택배상자를 훔쳐올 때, 백화점에서 손님의 구두를 신길 때, 여자친구를 만났을 때 축축해졌던 손은 들키기 싫은 감정을 들킨 것 마냥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그를 옥죄어 왔다. 죽은 고양이를 받아 든 여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올 때, 그의 손은 또다시 축축해졌다. 하지만 이는 미처 깨닫지 못한 감정의 표출, 동정과 연민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신의 실수로 우체부가 죽자 당황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그는 잘못을 무마라도 하려는 듯 땀 제거 스프레이를 손을 비롯한 곳곳에 뿌린다. 그가 스프레이를 뿌리는 행위는 억압된 감정에 대한 분출인 동시에, 죄책감과 당혹감으로부터의 일시적인 도피라고 생각했다. 그 동안 감정이 드러날 때마다 자신의 축축한 손을 감추고 감정을 숨기고 억압하려 했던 그에게 스프레이는 치료제인 셈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일시적이다. 그가 스프레이로 순간의 강박적인 감정은 해소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도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관계에서도,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며 자신의 감정을 잘 내보이지 않으려는 태도,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고독감, 허전함 등이 이러한 병적이고 강박적인 인간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6-12-10 01;42;00.PNG
 
 
  무대 연출은 대사가 적고 깔끔하다. 원작에서의 3인칭 시점을 어떻게 주인공 ‘나’의 무대로 풀었는지 궁금했는데, 시작부터 달라 새로웠다. 원작에서 잠깐 언급된 주인공과 전 여자친구의 이야기를 따로 떼어 한 장면으로 표현했다. 둘 사이에는 긴 테이블을 놓아 거리를 두었고, 서로 엇갈리는 움직임을 통해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를 나타냈다. 프레임의 벽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하나의 벽만을 사이에 둔 두 집간의 거리감, 한 개인의 무미건조하고 단절된 심리상태를 극대화하였다. 소설 속 남자를 여자 배우가 연기한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또한 연극적 분위기를 벗어난 현대적인 감각의 음향효과와 예상 밖의 동선을 가진 움직임들이 매력적이었다. 연극이지만 대사가 적고, 오브제와 움직임이 주가 되기에 흐름이 늘어진다고 느낀 관객도 더러 있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오브제로 짧은 희곡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데 의의를 두고 싶다.


[심한솔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