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천천히, 느리게 서촌 걷기 - 시시관광

글 입력 2016.09.1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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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강한지 일주일, 하지만 마음은 이미 일년. 매일매일의 시간이 아주 묵직하게 흘러간다. 상대성 이론이라는 게 있었는데. 무언지 잘 모르겠지만 몸으로 생생하게 실감하고 있는 느낌이다. 매 순간 매 상황에 따라 내 시간의 더딤을 되짚어 본다. 못견뎌한다. 9월의 첫째주란 그러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여행이 반가웠다. 여행이라고 해야 할까, 산책이라고 해야 할까. 서촌에서 시시관광을 하는 날, 느긋한 화요일이었다. 한 주가 시작되고 한 발 조심스레 뻗어보는, 그러나 아직 주말로 저물기엔 한참 긴 시간이 남은, 그래서 조금 어정쩡하고 조금 설레는 날이 화요일이렸다. 수업을 듣고 친구들을 만났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모이고 모여 4명이 되었다. 원래 가기로 했던 인원보다 사람이 많아져 조금 북적북적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서촌에서 어슬렁거리기 딱 좋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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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관광은 매우 시시한 여정이 될 예정입니다"


     시시관광은 루나 포토 페스티벌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기획된 퍼레이드였다. 서촌 지역의 소소한 길을 둘러보며 작가, 기획자, 참여자들이 함께 걸으며 각자의 속도와 풍경, 그리고 시간을 찾아가는 여행으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통인시장 뒷편 정자에서 출발하여 그 일대를 천천히 걸어본다. 우리가 그 곳에 가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게 될 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일단 떠났다. 느린 동네 서촌에서 느리게 걷는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닌 말이지만 오히려 아무 거나 다 될 수 있는 말. 조금 늦게 초대장을 전달받았는데 그 때 시시관광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시시한 관광이랜다. 웃음이 났다. 시시하게 걷고 오자고 선포하는 여행이 어디있단 말인가. 이상하게도 시시하다는 단어에서 자유로운 바람 냄새가 났다.

     통인시장 정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도착한 우리는 손으로 그린 것 같은 지도와 루나 포토 페스티벌의 팔찌를 받게 되었다. 딱 봤을 때 개성 넘치는 것 같은 분들이 모여 시장 앞이 알록달록했다. 퍼레이드에는 깃발이 있어야 하겠지. 한 구석에서 깃발을 만들어 볼 수 있었다. 지금 가장 집중하고 싶은 것, 시간을 들이고 싶은 것을 표현해보자고 했던 것 같다.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깃발을 만들어 손에 쥐고, 작은 여행을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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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지닌 기억"


     여행은 거북이와 함께였다. 인도해주시는 분이 직접 만든 작은 카트를 데리고 오셨다. 이 아이를 거북이라 부르신다 했다. 작고 투명한 수조에 찰랑이는 물, 데구르르 맞물려 돌아가는 바퀴, 딸랑이는 작은 방울. 우리는 아주 천천히 걸어갈 거라고 하셨는데 정말 아주 천천히 걸어가게 되었다. 거북이는 느렸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다닐 때, 조금 험한 길을 다닐 때마다 거북이는 덜컹거리며 투박한 소리를 냈다. 거북이에게는 다니기 너무 어려운 길이었던 것이다. 그 아일 정말 거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더 빨리 걷고 싶다는 생각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앞장서는 거북이, 뒷따르는 거북이들. 친구들과 나,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거북이가 되었다.

     우리가 지나가게 된 코스는 따지고 보면 그렇게 긴 코스는 아니었다. 통인시장 정자에서 출발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빌라 사이를 돌고 돌아, 옥인동 우물집과 이완용 집터를 들러 돌아오는 코스였다. 하지만 천천히 가다 보니 한시간에서 한시간 반정도 걸릴 거라 설명해주셨다. 여행이라 부르기 애매한 이 여행을, 내가 굳이 여행이라 부르고 싶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금 걷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딱 2년 전쯤 서촌에 놀러왔던 적이 있다. 지금 걷는 이 길을 그 때에도 걸었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 때에는 이름이 없었다. 시시관광 지도에는 그냥 주거지라 생각했던 길들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냥 집들이 아니라 원예대회, 미니멀리스트, 꽃의 메카……, 분명 익숙한 곳이지만 이미 이곳은 익숙한 곳이 아니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서촌이 많이 변해버린 점도 있다. 풍경이 변하고 속도가 변했다. 조금 더 복잡해졌고 조금 더 빨라졌다. 한 때 서촌에 살았던 거주자 분께서 여행에 함께해 주셨는데, 중간중간 길가에 멈춰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분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약간의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친구가 살던 집이 터는 그대로인데 다른 상점이 되었고, 동네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집은 새롭게 탈바꿈했다. 서촌이라는 장소가 지닌 역사와, 그 곳에 매인 삶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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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옹기종기, 비눗방울은 방울방울"


     공간을 보고, 말을 걸었다. 기억을 더듬어, 시를 지었다. 여정의 중간중간 인도해주신 분께서 시를 읽어주셨다. 각 장소가 간직한 이야기와 그에 얽힌 생각이 담긴 시. 그 기억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길이었던 곳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소중한 추억이 담긴 길이 된다. 그냥 스쳐지나갈 뻔한 풍경이 이름을 붙이자 꽃의 메카가 되기도 한다. 무언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아주 조금 다른 시선으로 공간을 바라볼 뿐. 사소한 것들이 내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사소한 것들이 내게 얼마나 예쁜 풍경을 보여줄 수 있는지.

     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둘레둘레 걸어다녔다. 이 짧은 여행을 위해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모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다른 사람들이 같은 풍경을 보며 같은 속도로 걷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때로는 빨리 걸어보기도, 때로는 느리게 걸어보기도 하면서 내 속도는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빠르다고 좋은 건 아니고, 느리다고 나쁜 건 아니다. 반대로, 느리다고 좋은 건 아니고, 빠르다고 나쁜 건 아니다. 내가 편안한 속도, 내가 좋은 속도로 뚜벅뚜벅 걸어나가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마음이 편한 여행길이었다. 그리고 다 다르더래도 비슷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임에 감사한 기분이 들었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천천히 기어가는 거북이의 발걸음을 맞추는 건 생각보다 힘겨운 일이었다. 아직 가을 바람이 채 못된, 가을을 기다리기만 할 뿐인 바람은 여름의 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서촌의 오르막길도 생각보다 더 오르막이었다. 주변에 산이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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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구석 예쁜 서촌 풍경"


     그렇게 조금 힘들어 질 때 쯤이면 언덕 너머 나타나는 새로운 풍경이 마음을 북돋았다. 그리고 친구들과,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들은 소소한 얘기들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다. 시시관광 도중 작가님께서 작품에 쓰실 사진을 찍는다고 하시며 사진도 찍었는데, 루나 포토 페스티벌에서 만나볼 수 있다고 했다. 루나 포토 페스티벌에 갈 기대에 마음이 여러모로 두근두근했다.

     골목골목 사진전을 마지막으로 시시관광은 끝이 났다. 작은 마을 정자에 모여앉아 참가자분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시간이란 무엇인지, 삶의 속도는 어떻고, 앞으로 어떤 속도로 나아가고 싶은지. 여행을 인도하고 기획하신 분이 얘기하셨다. 무조건 느리게 걷는 것이 아니라, 느림이나 빠름에 얽매임 없이, 오직 자기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보고자 했다고. 이게 중요한 것 같다고.

     이렇게 꽤 오랜 시간 서촌을 둘러보고 나서야 나는 내 삶의 속도를 마주할 수 있었다. 느리게 걷는 게 좋다, 좋다, 하면서도 내심 나는 내 시간에 있어서는 참 야박했던 것이다. 시간이 빨리 흘러버리기만을 바라고 바라던 게 내 진심이었다. 이제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순응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지금의 모든 일들이 지나고 나면, 나는 그 모든 힘든 기억들을 예쁘게 포장하여 곱게 미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차라리 남는 것 없이 어떻게든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고대했다. 아이러니하다. 목적도치인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내게 무엇이 남을까.

     짧은 여행 내내 손에 쥐고 있었던 깃발이 눈에 갔다. 여행이 시작할 때 만들었던 작은 깃발이다. 집중하고 싶은 시간, 소중하게 하고 싶은 시간에 대해 이렇게 썼더랬다. 지금 내 손에 닿는 모든 것들. 이 순간을 사랑하자,

     시시한 여정, 시시관광. 시시해서 시시하지 않았다.
     즐거운 서촌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준 모든 사람들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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