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과 나의 세계. 디스토피아인가? [문화 전반]

글 입력 2016.07.30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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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반] 당신과 나의 세계. 과연 디스토피아인가?


 유토피아. 본디 토마스 무어가 그리스어의 없는 이라는 의미의(OU-), 장소를 의미하는 TOPPOS라는 두 말을 결합하여 만든 용어인데 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뜻을 연상케 함과 동시에 좋은(EU) 장소라는 뜻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반면 이와 대비되어 만들어진 개념도 존재한다. 디스토피아. 이는 dys(나쁜)와 topos(장소)가 결합되어 만들어졌다.

 유토피아 장르는 사회를 개선하도록 요구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이상적인 사회나 국가를 제시하는데, 인간의 본성을 통제하며, 인간의 힘을 통해 이상 국가를 건설하되 그를 받쳐줄 수 있는 사회제도 또한 확충되어야함을 주장한다. 또한 이 장르는 다소 신화적이면서도 더 나은 현실사회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긍정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반면 디스토피아 문학 장르는 현대 문명의 문제점에 그 초점을 맞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자마찐의 우리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그리고 조지 오웰의 1984가 있다. 이 디스토피아 장르는 기존 유토피아 장르를 뒤틀어 현실을 과장하여 실제사회에서의 최악의 모습과 상태를 강조한다. 이렇듯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풍자의 방식을 주로 차용해 미래가 아닌 현재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날린다. 디스토피아 소설은 현 사회가 가져올 암울한 두려움에 대한 표현을 맞추기 위해 고도로 발달된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내세우는데 이는 인간이 성취한 업적으로 인한 오만과 우매함을 비판하며 그를 풍자하고 경고를 날리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이 글에서는 유토피아 장르 보단 디스토피아 장르적 특징과 작품들을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조지오웰의 디스토피아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장르 작가를 꼽으라 한다면 주저없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입을 모아 조지 오웰을 외칠 것이다. 그의 대표작 ‘동물 농장’과 ‘1984’에서 그려진 디스토피아적 면모들은 수 년의 기간을 거쳐 현대인과 그들이 응집된 사회에 다시 한 번 귀감과 경고를 날린다.


동물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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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민음사]


 먼저 ‘동물농장;을 살펴 본다면 기존 공산주의를 표방한 소련의 주요 인물들의 우화화를 통해 유토피아를 가장한 전체주의적 지도자들의 독재권력의지, 그로인한 타락과 부패 탐욕을 그린다. 하지만 대중들은 아홉 마리개 비밀경찰 들에 의한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 두려워 하며 정치인들을 무지 속에 현실에 안주하며 맹목적으로 믿게 되고 지식인들은 그에대해 방관자적인 자세를 취해버림. 무지와 무관심,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디스토피아 사회를 도래하는 암묵적 요인이라는 것을 전달한다. 나폴레옹 - 스탈린, 스노볼 - 트로츠키, 복서-무지한 민중, 아홉 마리 개 - 비밀경찰의 우화화를 거쳐서 말이다.

 사실 소설 ‘동물농장’보다는 1984가 디스토피아 소설 장르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를 관통하고 미래의 모습으로 강력히 점철되고, 미셸 푸코의 언급에서도 등장하는 판옵티콘의 모습이 1984 속에서 상당히 세밀히 묘사되고 있다.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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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민음사]


 이 소설에서 오웰은 정교한 디테일로 미래 세계의 모습을 그린다. 체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빅 브라더의 얼굴이 모든 건물에 걸려 존재하는 세계. ‘텔레스크린’의 감시에서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세계가 소설 속에서 그려진다. ‘이중사고’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하고 검열 당하며 체제가 주창하는 사실로서의 거짓을 철저히 내면화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도 또한 그려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조지오웰은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림에 있어 일말의 희망도 주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을 작품 속 배경인 오세아니아를 묘사하며 은밀히 전달하려는 듯하는 모습도 보인다. 과거의 역사는 끊임없이 조작되고, 진실이 기록된 문서들은 ‘기억통’ 속에서 재가 되는 세계. 고독감이나 사랑 같은 개인적인 감정들은 물론 감각까지 부인되는 세계를 그린 것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계가 공식적으로 ‘신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언어에선 good의 반대말은 bad가 아니다. un-good이며, splendid나 wonderful 같은 어휘들은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제거된 뒤 plus-good 또는 double-plus-good으로 대치된다. 극도로 사유의 단순화를 꾀하는 이 언어를 통해 체제는 인간의 사유와 이성적 사고를 제한하려 한다.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려 해도 이를 뒷받침할 수단인 언어가 되지 않도록 파괴시키는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든 ‘다르게’ 생각하려 애쓰는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이 바로 글(일기)을 쓰는 행위라는 사실은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사실, 이 소설 속의 공포스러운 세계가 경고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웰은 권력과 전체주의의 생리를 통찰하고 인간의 존엄을 필사적이고 절망적으로 옹호하려 한다. 사랑으로서 그 모습을 극복해나가려는 윈스턴의 처절한 모습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가 그려낸 개인성, 사생활의 파괴와 붕괴된 가정의 단위, 끊임없이 수정되고 변하는 역사, 사유의 수단인 언어의 파괴, 모든 것을 감시하고 감시 당하는 불신의 도래, 그리고 이를 통해 자연스레 따라붙게 되는 도덕의 타락, 인간성의 말살로 이어지는 절망적인 사회의 모습은 오웰이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지금의 사회에서도 그 흉측한 이빨을 보이고 있는 듯하다.

 번외로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와 쟈마찐의 우리들 또한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3대 디스토피아 소설 장르로 취급받지만 이 글에선 다루지 않는다. 디스토피아적 요소에 흥미가 생긴다면 필히 읽어봐야할 책이다.



영화로 묘사된 디스토피아


블레이드 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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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레이드 러너는 2019년 미래를 배경으로 그려진다. 그 시대에는 인간들이 살 수 있는 행성을 차지하기 위해 ‘리플리칸트’라는 복제인간을 만들어낸다. 복제인간들 중 몇몇 복제인간이 혹여나 인간의 삶을 침범하지 않을까 싶어 제한된 4년이라는 수명에 거부하고, 제한된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행성을 탈출해 지구로 향한다. 복제인간을 폐기하는 의무를 지닌 블레이드 러너 ‘테커드’가 이를 뒤쫓는다. 그 과정 중 데커드는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 복제인간 반란 무리의 수장 로이가 그를 구출해준다.

 이 영화는 인간이 구성한 사회에서 과연 유토피아는 무엇이며 디스토피아는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하는 포괄적 물음을 던진다. 이윽고 이러한 물음을 통해 세밀한 영화만의 답을 제시한다.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과연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이며, 인간을 인간이라고 정의 할 수 있는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현대 사회의 인간들은 인간의 권리나 가치 등을 언급하며 인간의 존엄함을 맹목적으로 지키고자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에선 인간들이 고도로 발전된 과학적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인간 스스로가 복제인간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똑같이 감정을 느끼고 살아가게끔 만든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폐기하기도 한다. 인간들이 과연 또다른 인간을 만들어낼 권리와 그것을 없앨 권리가 존재하는가? 이 영화는 그들이 스스로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파괴하는 아이러니컬한 모습을 보여준다. 고도로 발전된 과학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보여지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존엄한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지닌 모습이 온데간데 없는 디스토피아가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복제인간 로이가 데커드의 목숨을 구하는 장면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주인으로 여기라 명했던 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다시 한 번 자극받고 구원받을 때 이 영화의 디스토피아적인 측면은 극대화 된다.


가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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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타카에선 인간이 고도로 발전된 유전자 과학으로 인해 그 오만과 탐욕을 마음껏 발휘하는 디스토피아적 세상을 펼친다. 유전자 조작이 가능해짐으로서 그 조작된 우성 유전자로서만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만약 열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성향은 무시당한다. 그 사회 속에선 조작된 유전자로 만들어진 완벽함만을 추구하며 각 개인이 가진 특별한 능력과 노력은 고려해야할 중요한 요소로서 취급받지 못한다.

 각 개인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인간으로써의 개성.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나야만 하는 것에 대해 망가지고 분쇄된 고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우성과 열성으로 인한 인간의 심각한 계급 분화. 그들 간 계급과 계층의 이동은 전혀 허락되지 않는다. 이러한 조작된 유전자로 보여지는 디스토피아적 면모는 비단 지금 현존하는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만큼 멀고 공감되지 않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조금 더 우수한 질을 물려받는 유전자를 교배해 만드는 슈퍼푸드와 우성 유전자를 물려받는 시험관 아기를 배양하는 일이 종종 자행된다. 하지만 이러한 유전자만을 통해서 그 아이가 가지고 있을 성격이나 특성과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곧 그 아이 자체의 정체성을 인위적으로 심어주는 꼴이 되며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는 짓이다. 하지만 이미 디스토피아는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자리잡고 있다. 각 개인이 빛나는 사회가 아니라 개인은 유전자를 중시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의 부속품으로서 자리잡게 될 것만 같은 막연한 두려움을 영화 속에서나 서서히 변모해가는 사회를 보면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호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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