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onion] '가족', 그 질기고도 따뜻한 -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시각예술]

글 입력 2016.07.14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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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작스레 짐을 싸서 집을 나가버리는 엄마. 그리고 일곱 살 아들과 단 둘이 남겨진 워커홀릭 아빠, 이들이 만들어가는 그들만의 사랑의 방식에 대하여. 이것은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로버트 벤튼 감독의 창작물로 1980년에 개봉하였다. 창작되고 개봉된 지 36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오늘날의 시선에서도 충분히 공감 가능하다. 개봉한 지 이렇게나 오래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 ‘이혼’,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정체성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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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많은 부부들이 결혼 후 서로에게 이별을 고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 역시 8년이라는 길지 않은 결혼 생활 끝에 조안나의 일방적인 통보로 이별하게 된다. 조안나는 아들 빌리에게 그녀가 떠난다는 것을 미처 이야기하지도 못한 채 도망가듯 집을 나온다. 남편 테드는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만 그녀는 한순간 그를 떠나 몇 달간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 평범해 보이기만 하던 안정적 가정에서 조안나가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면서까지 집을 떠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가 평범하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가정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가정적이어야 하며 육아에 높은 관심을 기울일 것을 강요받아 왔다. 그러나 점점 여성의 사회권이 확대되고, 여성 역시 직장을 가지게 되면서 남성과 여성은 서로 가정과 직장에서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영화의 조안나 역시 대학을 졸업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디자이너였다. 그러나 결혼 이후 그녀는 사회인으로서의 그녀의 역할을 포기하고 테드의 ‘아내’, 빌리의 ‘엄마’로서 살게 된다. 결혼으로 인해 그녀의 역할이 ‘엄마’이자 ‘아내’로 규정지어 진 것이다. 그녀는 직장을 가지고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테드에게 이야기하였지만, 테드는 자신의 업무로 지나치게 바빴고 그녀의 고민에 귀 기울여 주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조안나는 스스로를 잃어가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사회인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희생하면서까지 가정을 지키려고 하였지만, 자신의 불만에 대한 남편의 무관심과 사라져 가는 사회인으로서의 정체성 속에서 혼란을 겪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아들을 두고 떠나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그녀의 행동은 물론 비이성적이었지만, 그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든 여자든 어떠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흔히 자신의 역할 중 하나를 포기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소중한 것, 특히 ‘가족’이라는 관계 앞에서 가장 쉽게 희생된다. 우리의 존재는 다양한 관계 속 우리의 역할로 인해 구성된다. 우리는 한 사람의 자녀이자 엄마, 직장인이자 친구이며 이러한 역할들이 모여 ‘나’를 구성한다. 이러한 역할 중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하는 것은 쉽게 용인되고 받아들여진다. 예컨대 ‘가족 구성원’이라는 역할의 가치 앞에서 다른 역할의 가치들은 쉽게 평가절하 되곤 한다. 오늘날 직장에서도 역시 ‘직장인’으로서의 역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역할들을 줄이고 일에 몰두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어떠한 역할들, 즉 정체성들은 알게 모르게 강요된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역할을 요구하고, ‘소중한 것’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명목 하에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우리는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미숙하지만 온전한, '부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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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가 여전히 공감가능한 또 다른 이유는 ‘부성애’라고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오랜 기간 육아는 여성에 의해 이루어졌다. 남편을 ‘바깥사람’, 아내를 ‘안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우리의 언어 표현만 봐도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즉, 남성은 사회적인 일을 수행하는 사람, 여성은 집안일과 육아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인으로서의 여성과 남성의 위치가 동등해지면서 이러한 기존의 역할 분담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게 되었다. 가정에 충실하고 가사와 양육을 아내와 함께 수행하는 남편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이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영화가 제작된 1980년대보다 오늘날 더 익숙한 모습이다. 비록 영화에서는 이혼 후에야 ‘부성애’를 보여주는 아빠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다정다감하고 가정을 먼저 생각하는 아빠의 모습은 오늘날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남성상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아빠 어디가’ 등의 프로그램들은 오늘날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은 엄마가 부재한 상황에서 아빠가 오롯이 아이를 돌보는 모습을 담아낸다. 모성애를 기반으로 한 ‘엄마’의 양육 방식과는 다른, 아빠들의 사랑 방식과 육아에 대해 다루고 있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감정 표현이 미숙하고 아이를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육아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편견을 극복하고, 아빠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역시 아버지 테드의 부성애를 잘 그려내고 있다. 양육과 가사일은 결혼 후 일을 그만 둔 조안나가 전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에 테드는 그동안 그러한 부분에 대해 부담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안나가 갑자기 그를 떠난 후 테드는 아침 상 차리기, 학교에 빌리 데려다주기를 비롯해 모든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어색하고 미숙하지만, 테드는 최선을 다한다. 빌리와 함께 토스트를 만드는 두 번의 장면에서 그가 노력 끝에 어색함, 미숙함을 극복하고 그들만의 방식을 구축해 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첫 번째로 함께 토스트를 만드는 것은 조안나가 떠난 다음날이다. 어떤 재료를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용기를 사용해야 하는지, 프라이팬은 어디에 있는 지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다. 빌리가 테드에게 조안나가 했던 방법을 알려주지만, 여전히 그는 미숙하고 결국 프라이팬과 토스트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이 장면에서 테드와 빌리의 모습은 떨어진 토스트처럼 불안하다. 빌리는 조안나가 갑자기 떠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테드에게 계속 질문을 하며, 테드 역시 조안나의 갑작스러운 통보와 빌리의 질문에 짜증이 나 있다. 금방이라도 감정이 폭발할 것 같은 둘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을 졸이게 된다. 그러나 두 번째로 이들이 함께 토스트를 만드는 장면에서는 이러한 불안감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토스트를 만드는 두 번째 장면은 테드가 양육권 소송에서 패배한 후 조안나에게 빌리를 보내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등장한다. 이번에는 눈빛만 보아도 서로가 필요한 것을 알고 손발도 척척 맞는다. 이 두 장면 사이에는 그들의 관계를 개선시키고 적응하기 위한 테드의 노력이 있었다. 모성애에 결코 뒤지지 않는 조금은 무뚝뚝한 아빠들의 사랑, 우리는 이것에 공감할 것이다.


3. 진정한 이해와 ‘가정’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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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갑작스레 집을 떠난 조안나는 아들의 양육권을 찾기 위해 다시 돌아온다. 테드 역시 소중한 아들인 빌리를 지켜내기 위해 실직 후 하루 만에 모든 가능한 일자리를 찾아보고 돌아다니는 등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양육권 소송에서 법정은 모성애의 손을 들어준다. 테드는 항소를 하려고 하지만 항소심에서는 빌리가 법원에 증인의 입장으로 서야한다는 변호사의 말에 항소를 포기하고 만다. 빌리의 양육권을 지켜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빌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안나가 없는 길고도 짧은 시간동안 빌리와 많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고, 빌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빌리의 상처와 아픔에도 공감하게 되면서 그는 빌리를 양육권 분쟁으로 법원에 세우는 것이 얼마나 빌리에게 상처가 되는 일인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아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빌리의 양육을 결국 포기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러나 양육권 분쟁에서 승소한 조안나는 빌리를 데리러 오기로 한 날, 뜻밖의 결정을 내린다. 그녀는 ‘빌리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는데, 와보니 빌리에겐 이미 집이 있었다’는 말을 하며 빌리를 데려가지 않기로 결정했음을 밝힌다. 조안나는 그녀가 자신의 집에 빌리의 방을 다 꾸며 놓았는데 구름을 벽지에 미처 그리지 못했다며 슬퍼한다. 조안나는 원래 빌리의 방에 있던 ‘구름’을 자신의 집에 마련한 빌리의 방에도 그려야만 빌리가 안정감과 익숙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정감과 익숙함은 단지 구름 모양의 벽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구름 모양의 벽지는 옮겨질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빌리의 ‘집’이자 ‘가정’을 의미한다. 조안나는 구름을 벽지에 그려놓지 못해서 빌리를 데려갈 수 없다고 했지만, 그녀는 빌리의 삶에 테드가 벽지에 그려진 ‘구름’과 같은 익숙하고 당연한 존재가 된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데려가지 못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가정’은 구름 모양 벽지와 같은 것이다. 구태여 의식하지 않지만 항상 그곳에 있는, 그렇기에 안정감을 주는 그런 것. 그리고 ‘가정’은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수반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빌리를 항소심에 데려갈 수 없어 양육권을 포기한 테드, 빌리에게 테드가 ‘집’이 된것을 이해하고 양육권을 포기한 조안나 모두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던 것이다.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가정을 이루는 바탕이 되며, 이것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들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영화가 개봉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 같다.





(사진: 네이버 영화)


[노혜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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