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개그콘서트에서 읽어내는 대중예술 [문화 전반]

글 입력 2016.06.03 02:3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201211122002461110_1.jpg 


 개그콘서트는 KBS의 간판 예능 프로다. 그리고 사실 KBS만의 간판프로가 아니라 주말 예능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개그콘서트의 인기는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얻은 타방송 개그맨들이 KBS 개그맨 공채 시험을 다시 볼 정도로 독보적이다. 게다가 개그콘서트의 영향력은 단순한 시청률에서 끝나지 않는다. 개그콘서트에서 이슈가 된 코너나 유행어는 다른 예능에서 재매개되기 때문에 개그콘서트를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그 영향력이 확장된다. 개그콘서트를 보지는 않아도 유명한 유행어는 아는 현상도 이 때문이다.

개그콘서트는 1999년 9월 4일에 시작한 장수 프로그램이며, 2012년 4월 8일부터 현재까지 매주 일요일 밤 9시 15분부터 11시까지 방영되어 왔다. 개그콘서트는 약 14~16개 코너의 나열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코너는 이를테면 ‘개그콘서트’라는 문장에 포함된 하나의 낱말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들 코너는 원칙적으로 독립적이며, 그 내용이 이어지지 않는다. 이 코너들이 합쳐져 총 약 100분 간 방송된다. 방영되는 코너의 수와 순서는 매번 바뀐다.

이 코너들은 어느 정도 유지되다가 종영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코너가 채우게 되는데, 이 기간은 일정하지 않다. 시청률이 높으면 오랫동안 유지되고, 낮으면 교체된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개그콘서트는 변화에 민감할 뿐 아니라 시청자들의 요구에 그 어떤 코너보다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렇듯 개그콘서트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법칙은 ‘시청률’이라는 동일한 목적 하에 이루어진다. 각 코너는 특정 말, 음악, 행동, 그리고 서사적 구조를 반복함으로써 하나의 코너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코너에 예측가능성을 부여함으로써 대중에게 호응을 얻을 뿐 아니라 ‘대중의 기대에 부응한다’는 대중예술의 조건을 만족한다. 서사 구조, 음악, 유행어들이 반복되는 개그 프로의 예시는 잠시만 생각해도 쏟아져 나온다. 반복 요소가 프로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 개그 코너를 찾는 게 더 힘들다.


두근두근.jpg
뚜 뚜루 뚜뚜 기억하시는가


이처럼 개그콘서트는 하나의 완성된 연속적 콘텐츠라기보다는 여러 조각들의 집합이다. 이 조각들은 또 그보다 작은 여러 개의 조각들의 배열이다. 물론 여러 분야가 이러한 구조주의적 입장에서 해석 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창작물들, 특히 순수예술에 비해서 개그콘서트는 이러한 조각들의 존재가 노골적으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 조각들은 다른 분야에서보다 훨씬 더 분절되어 있다. 개그콘서트라는 프로그램은 하나의 기계처럼 각각에 해당하는 부품들을 가지고 있다. 이 부품들은 각자의 일에 충성하며, 그 외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이러한 체제의 장점은 하나의 부품의 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 매우 간편하게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한 코너의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는다면, 그 코너를 종영하고 새로운 코너를 넣으면 된다. 서사적 하위구조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한 부분만 다른 하위구조로 대체하면 된다. 기계적 체제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반영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개그콘서트의 궁극적 목표는 시청률이다. 시청률이 올라야 광고가 많이 붙고, 광고가 많아야 수익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개그콘서트의 구조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중예술이 이러한 구조 속에 예속되는 것이 바람직하기만 한가. 기계적 구조에 의한 예술은 창작과는 거리가 멀다. 슬롯머신과 같이 각 자리마다 몇 개 주어지지 않은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라 배치하는 작업은 창조라고 하기에는 너무 조악하다.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문화산업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미디어는 근본적으로 상징권력을 가진다. 사회의 가치체계를 설정함으로써 개인과 단체의 의사 결정과정에 무의식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미디어 조직들이 집중화되고 이들이 다른 산업들과 연관이 되면서 미디어는 실재 권력으로 변모해간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 조직이 기업화되고, 수익을 좇기 시작하면서 상업주의에 물들기 시작한다. 특히 수익을 좇기 시작하자 손해를 내지 않는 콘텐츠만을 배포하게 된다. 새로운 것에 대한 실험이 존재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문화산업은 획일화 될 수 밖에 없다.

개그콘서트가 우리나라 공영방송인 KBS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개그콘서트의 분석과 아도르노의 비판이 겹쳐 보이는 것은 분명 씁쓸한 일이다. 상업주의에서 가장 멀어야 할 공영방송에서조차 이렇듯 시청률이 절대적 목표가 되는 프로그램을 방영한다는 것은 현대 우리 사회의 미디어, 그리고 더 나아가 미디어를 통해 배포되는 문화산업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이렇듯 전형적 구조와 통일성을 시청자들이 선호한다는 점이다. 개그콘서트는 통일적 구조가 지배한다. 그런데 이렇듯 통일적 구조로 인한 획일화가 시청자에 의견과 충돌하는 생산자의 독단이라면, 비교적 자유도가 높은 코너가 시청률이 높아야 하고, 또 시청률이 모든 법칙을 지배하는 개그콘서트 특성상 그 부분으로의 개발이 이루어졌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자유도가 극도로 낮았던 (이후에는 조금 풀어졌지만) ‘뿜 엔터테인먼트’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댄스’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그와 접목시킨 ‘댄수다’ 코너는 최하위 시청률을 기록한다. 통일 구조는 시간이 가도 옅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더 여러 방면으로 개척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시청자들, 다시 말해 일반 대중이 획일화된 콘텐츠를 창조된 예술보다 선호한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것’을 보는 것보다 예측 가능한 콘텐츠를 보는 걸 선호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익숙한 것에 안주하려는 성향은 ‘상식’을 만들어낸다. 한 가지 시각, 알고 있는 지식에만 길들여져 어떠한 명제를 의심하고 질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럴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완벽한 지배이며 의문의 부재다. 물론 개그콘서트의 구조만 분석하고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예언하는 것은 비약일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 개그콘서트의 기계적 구조는 현대의 대중예술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단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