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르한 파묵 < 순수박물관1, 2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문학]

나만을 위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누군가를 위한 사랑이 전부일 뿐.
글 입력 2016.03.12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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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은 경험한 만큼만 알 수 있는 무언가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관한 이론적인 박사들은 많지만 실제 삶에서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지켜낸 사람들은 드물다. 노년까지 한결 같은 부부의 이야기가 다큐멘터리나 영화로 제작되는 것만 봐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흔한 멜로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마찬가지. 사랑은 함께 있으면서 자연스레 무르익고 단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행복감이 아니라 오히려 한시도 방심해선 안 되는 투쟁의 모습과 더 닮았다. 그런 의미에서 책 한 권을 꺼내볼까 한다. 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 책 뒤편에는 이런 소개가 있다.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 짧은 소개글만 읽어도 예감할 수 있겠지만 정말 다 읽고 나면 사랑 이야기를 읽었다기보다는 한 편의 전쟁 영화를 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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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박물관. (이미지 출처: Yes24.)


  터키 이스탄불의 부유한 집안 남자 케말. 아름답고 교양 있는 약혼녀 시벨도 있고 잘 나가는 회사 일까지 하는 부러울 것 없는 남자다. 이대로라면 미래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 앞에 등장한 퓌순이라는 여인. 가난하지만 미인 대회에 나갈 정도이니 외모가 아름다운 것은 말할 것도 없는데다 어리고 생기발랄하다. 그와 그녀는 자주 밀회를 갖고 사랑을 나눈다. 처음 느껴보는 가슴 벅찬 사랑의 열락(悅樂)에 케말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녀의 육체와 아름다움을 탐하며 한편으로 막연한 꿈을 갖는다. 자신과 비슷한 집안 수준의 여자인 시벨과 그대로 결혼하여 가정은 가정대로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퓌순과는 계속해서 만나면서 사랑의 기쁨을 즐기고 싶다는. 그러나 역시 그 44일간의 달콤한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야 만다. 시벨과의 약혼식이 있던 날 퓌순이 크게 상처를 받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경솔함과 안일함을 깨닫고 그녀를 찾아 헤매며 후회한다. 

  자칫 신파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야기가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유는 작가의 탁월한 묘사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 누구도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는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열정적인 순간에, 삶의 그 황금의 순간을 ‘지금’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혼 한구석에서는 앞으로 이 순간보다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한 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도 믿는다. 왜냐하면 특히 젊은 시절에는 그 누구도 상황이 나빠질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을뿐더러, 만약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하다면, 미래도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낙관적이기 때문이다.    -p. 125


퓌순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내 인생은 당신과 결부되어 있어.” 이 말이 좋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다.   -p. 126


사랑은, 물론 우리를 지금 행복하게 해 줘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의 아름다움과 힘은 우리 영혼에 얼마나 깊이 인상을 남겼느냐에 따라 평가되지요.    -p. 227


거울 앞에 있는 작은 선반에 놓인 퓌순, 타륵 씨, 네시베 고모의 칫솔, 면도용 비누, 면도기 사이에서 퓌순의 립스틱을 보았다. 그것을 집어 냄새를 맡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의 향기를 기억하려 하면서 걸려 있는 수건에서 급히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왔기 때문에 깨끗한 새 수건을 내놓았던 것이다. 여기서 나간 후에 보내게 될 힘든 날들에 나를 위로해 줄 또 다른 물건을 찾으려고 작은 화장실을 훑어보다가, 거울에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의 몸과 영혼 사이의 치명적인 단절이 내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    –p. 391



  사랑 앞에서 오만했던 남자. 케말은 퓌순도 그를 끔찍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를 영원히 소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전혀 멋지지 않다. 이별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며 약혼녀에게 변명하고 상처 주는 모습은 지지리도 못났다. 하지만 사랑의 또 다른 이면, 방심하는 순간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내밀한 외로움과 그리움, 공허, 기나긴 슬픔을 알게 된 이상 그의 삶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퓌순을 향한 처절한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을 알게 되고 8년간은 지켜보기만 한다. 이제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와 육신에만 매혹되지 않는다. 그녀의 물건들, 그녀의 가족, 그녀의 취미, 그녀의 공간, 그녀의 사소한 몸짓과 그녀의 고민들 그 모든 것 앞에서 압도되고 전율을 느낀다. 그러나 운명이 야속하게도 또 한순간의 실수로 그녀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마는 남자.


  사랑이라는 건 어찌 보면 저주임에 틀림없다. 그 비극은 지금 내 곁의 사람마저도 나와 영혼이 꼭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에서 시작되어 앞으로도 그러지 못한다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 자신을 다 포개고도 남을 영혼은 없다. 나만을 위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누군가를 위한 사랑이 전부다. 만나서 즐겁고 쾌활하고 로맨틱한 시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매우 작은 일부 교집합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바라볼 수 없는,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무한의 여집합 앞에서 연인들의 교집합은 의미가 무색해지는 경우가 많다. 사랑은 그 알 수 없음에 대해서 상대를 극도로 그리워하는 정신병이다. 케말은 그 점에 대해선 충실했던 남자다.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결말 앞에서도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선 어떤 삶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은 사랑이 가져다주는 고독과 불안에 뛰어든 한 남자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이자 한 인간에게 있어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순간과 하루와 생을 만들어주는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상기시켜주는 책이다.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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