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오만과 편견, 문화예술이 담다[문화 전반]

글 입력 2016.02.24 19:0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누구나 한 번 쯤 들어봤을 만한 <오만과 편견>의 글귀이다. 영국의 여류작가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인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젊은 남녀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결국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인간의 오만과 편견이다.
 
1800년대 전후를 배경으로 한 <오만과 편견>은 이후 조 라이트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 책의 글귀가 인용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오만과 편견>이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 현대사회가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만과 편견이 한 인간에게, 한 사회에 가져온 불행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겠지만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가장 대표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수많은 정치인과 운동가, 종교인들이 다각도로 저항해왔고 문화예술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의식을 담아내어 저항의 움직임에 동참해왔다.
 
 

(null)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
 
1960년에 처음 발간된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는 어린 소녀의 관점에서 미국 내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루고 있는 성장소설이다. 1961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 책은 미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도서로 선정될 만큼이나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대중의 감수성을 자극했다.
 
 
97666_76566_1755.jpg
 
 
이 책은 소녀 스카웃의 시점으로 사건을 풀어나가고 있지만 사실상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를 통해 우리에게 인종차별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책 속에서 애티커스 핀치는 유능한변호사로 강간 누명을 쓴 흑인 톰 로빈슨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명백한 증거를 통해 톰 로빈슨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지만 배심원단은 톰 로빈슨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이 과정 속에서 작가는 애티커스 핀치를 깜둥이 애인이라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통해 백인 우월주의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또한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스카웃과 오빠 젬이 톰 로빈슨의 유죄 선고에 분노하는 모습을 통해 흑인을 차별하는 것, 그가 흑인이기 때문에 범인일거라 단정짓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라는 문제의식을 전달하고 있다. 흑인을 대하는 오만한 백인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웃인 부 래들리에 대한 애티커스 핀치의 태도를 통해서도 우리는 오만과 편견을 꼬집는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누구도 집밖으로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부 래들리를 두고 마을 내에서는 그가 가위로 허벅지를 찌른다느니 하는 온갖 소문과 루머가 떠돈다. 호기심이 넘치는 나이인 스카웃과 오빠 젬은 그 루머들을 확인하고자 부 래들리의 집을 서성거리거나 숨어들기도 한다. 하지만 애티커스 핀치는 자식들에게 그는 단지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뿐이며 우리와 다를 바 없다고 타이른다.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해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부 래들리와 톰 로빈슨의 공통점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열등하다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 작가는 애티커스 핀치의 태도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애티커스 핀치는 이런 말을 한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사람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선사하는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죄라고 말이다. 인종차별은 바로 그런 앵무새 죽이기라는 것을 하퍼 리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null)
<언터쳐블, 1%의 우정>
 
올리비에르 나카체, 에릭 토레다노 감독의 영화 <언터쳐블, 1%의 우정>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프랑스 영화로 상위 1%의 남자 필립과 하위 1%의 남자 드리스의 뜨거운 우정을 그리고 있다. 필립은 백만장자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벌어도 만져보지 못할 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전신이 마비된 장애인이다. 반면 드리스는 무일푼에 백수인데다가 전과도 있으며 인종적으로도 흑인이지만 신체는 매우 건장하다. 필립은 자신을 돌봐줄 사람을 구하던 중 드리스를 선택하게 되고, 공통점이라고는 없는 이 둘은 세상 남부럽지 않은 우정을 나누게 된다.
 
movie_image7I9286Z3.jpg
 
이렇듯 영화 속 두 주인공은 인종뿐만 아니라 직업, 재산, 건강상태 등 여러 면에서 극과 극을 달린다. 하지만 어떤 차이점보다도 인종은 그 둘 사이를 갈라놓기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흑인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접촉조차 하지 말아야할 사람, 언터쳐블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필립이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진 오만한 가치관의 소유자였다면 드리스를 간호인으로 절대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필립의 행동이 비난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오만함이 당연한 사회였으니까. 하지만 필립은 드리스의 피부색에 감춰진 그의 순수하고 착한 심성을 알아보았다. 흑인은 범죄를 일으키고, 사회적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편견이 깊이 뿌리박힌 사회에서 이를 뛰어넘어 상대를 바라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까.
 
둘의 이야기는 픽션이라해도 충분히 감동적이지만 실화라는 점에서 더욱 진한 감동을 자아낸다. 인종을 넘어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서로의 다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둘의 모습은 그동안 오만함과 편견 때문에 좋은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는 기회들을 내 발로 걷어차지는 않았는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_88160320_88160319.jpg
 
얼마 전 비욘세는 수퍼볼 하프타임 무대에 올라 그녀의 명성에 걸 맞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평소 같으면 역시 비욘세! 정말 멋진 무대였다!’ 같은 타이틀의 기사가 쏟아졌을 테지만 이번 공연은 다른 이유로 화제가 되었다. 그녀가 수많은 흑인 여성 백댄서들과 신곡 ‘formation’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급진적인 흑인 단체 블랙 팬서를 연상시키는 의상과 흑인 인권을 부르짖는 가사와 함께 말이다.
이번 일을 두고 비욘세가 상업적인 의도로 ‘formation’을 불렀다거나 슈퍼볼 하프타임 무대는 연설을 하는 곳이 아니다 등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욘세가 슈퍼볼 공연을 정치적으로 멋지게 이용했다면서 그녀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보기에 그녀의 이번 공연이 크게 논란이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노래가사는 흑인이 백인보다 낫다는 내용도, 백인을 다 없애야 된다는 극단적인 내용도 아니었다. 문화예술에서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루는 것은 비일비재했고 비욘세 역시 자신의 문제의식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드러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예술은 셀 수 없이 다양한 소재들을 다룬다. 정치적인 사안을 문화예술에 담아내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흑인 인권에 대해 노래한 것이 비난받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자 편견일지도 모른다.
 
    
 
[반채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20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