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라는 이름의 왕

[Opinion]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성석제의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유년시절 [문학]
글 입력 2016.02.21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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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저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과 살아가는 아이의 삶은 끝나는 날까지 안전할 것이라 하였다. 유년기의 추억이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유년 시절의 기억은 머리가 아닌 몸에 남는 기억이라고 한다. 사건을 연대적이고 논리적으로 기억하는 성인들과는 다르게, 유년 시절의 따스한 햇살의 온기, 아련한 저녁 노을, 밥짓는 냄새의 구수함은 '기억의 촉감'으로서 고스란히 몸에 각인된다. 그리고 다 커버린 우리는, 이제는 되돌아오지 않을 날들을 희뿌연 형상으로 추억하곤 한다.

소설가 성석제는 이처럼 한때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세계를 동경하는 작가이다.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자신이 보고 겪은 것, 만난 사람과 그때의 느낌을 남은 물론이고 스스로 믿을 만한 것으로 여기게 하기 위해서라고 답한 그의 말처럼, 그의 소설 <아름다운 날들>은 선명하나 선명하지 않게, 마치 눈을 감으면 떠오를 것만 같은 유년 시절의 기억들을 글로써 그려놓았다. 

이야기는 '장원두'라는 소년의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주인공 살바토레 디 비타가 어린 시절의 시실리를 추억하듯, <아름다운 날들>은 장년이 된 성석제의 유년 시절을 '옛날 옛날에, 장원두라는 착한 소년이 살았습니다...' 로 시작하며 한 소년의 입을 빌려 재구성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시대사회적인 변화가 막 일어나기 시작했던 육칠십년대의 전형적인 농촌이다. 이 시기 한국 농촌의 현실은 온 나라의 본격적인 산업화, 이농 등이 진행되던 문턱에 놓여 있었고, '읍민가창경연대회'나 혼식분식 장려 운동과 같은 사회적 자본의 초기 형태와 집단 규율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어 새마을운동 아래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대체되는 한편 미국에 의한 국제 원조가 여전히 실시되고 있던 가난한 시절이였다. 또, 정부의 영농 정책으로 인한 농촌의 피폐한 현실이나 공교육의 국가주의적 훈육화가 확실히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이기도 하다. 이처럼 <아름다운 날들>은 성석제 특유의 말장난이 돋보이는 이야기체를 활용한 픽션의 방식으로 논픽션을 전달한다. 또한 이토록 철저히 논픽션에 근거하였기에, 소설은 그 흔한 절체절명의 위기도, 인생을 송두리채 바꿔놓을 사건도 없이 한 영혼의 성장 소설이 될 수 있었으며, 이야기속 세계에 발을 들인 독자에게 깊은 잔영을 남겨준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소설은 소년의 기억을 통해 전개된다. 우리의 주인공, 아니, 관찰자 장원두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은척읍의 변두리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여과없는 아이의 시선으로 전달한다. 딴에 스스로를 똘똘하다고 여기며 가끔 영악함도 보이는 아이지만 어른들의 모든 이유를 아이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이의 눈은 정확하며 통찰력있다. 동네 어른들이 기피하는 백수 청년 기타 리와 어울리면서, 동네 바보라 불리는 진용이와 어울리면서 아이는 어른들이 알려 주지 못했던 것들을 문득문득, 생각해낸다. 아이가 기억하는 것은 혼식분식 운동의 효과나 새마을 운동에 대한 정부의 계획 따위가 아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인물들이 드문 드문 보여주는 쓸쓸한 인생의 성숙함, 기타 리의 노래자랑 참가비를 바련하기 위해 방앗간에서 쌀을 훔친 것을 알게 된 할아버지의 고요한 꾸지람의 깊이, 마을에서 나름 권위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의 미성숙한 면모 등을, 아이는 오감으로 기억한다.

원두의 세계를 조용히 지탱하고 있었던 할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원두의 삶은 유년의 문지방을 넘어 정신없이 흘러간다. 260페이지가 넘는 소설 중, 변해버린 마을을 잠시 방문한 원두의 기억 속 어른으로서의 그 동안의 삶은 단 4줄로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다. 어른의 삶을 이토록 짧게 정리해 제시한 것은 한없이 영원하고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던 끝끝내 돌아오지 않을 시절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이를 무기력하게 추억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리라. 그러나 아름답게도, 시절은 돌아오지 않지만 유년의 기억은 감각 곳곳에 살며 이발소에 걸려있던 선명히 떠오르지 않는 한 시구와 같이, 떠올릴 때마다 우리의 목을 살짝 메이게 만들며 돌이킬 때마다 다시 어린 소년으로 돌아가게 한다. 우리는 유년의 기억에 영원히 속해있다. 어쩌면 감각에 살며 선명하지 않기에, 이는 더욱 아련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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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노래는 이승에도 천국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천국은 대체로 어린 시절에 속해 있고 추억이라는 이름의 왕이 다스린다. 

- 작가의 말 中 -



[장효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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