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황량일몽(黃梁一夢) : Cooking a Dream>
: 밥을 짓는 순간의 미학
[황량일몽]:중국 당대 전기소설인 침중기(枕中記)를 무대로 올린 작품. 노생이 한 주막에서 도사 여옹의 베개를 베고 자다 꿈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깨어보니 주위환경이 꿈꾸기 전과 똑같은지라, 그로 인해 깨달은 바 있어 속세의 욕망을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부귀공명을 갈망하던 당시의 풍조를 풍자한다. 꿈을 모티브로 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구운몽과 닮았지만, '입몽(入夢)'과 '각몽(覺夢)‘이 밥을 짓는 일련의 과정으로 연결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Cooking a dream: 왜 밥을 짓는 순간인가]
‘조‘를 의미하는 황량(黃梁), 일순간의 꿈을 의미하는 일몽(一夢)이 합쳐진 ’황량일몽’이라는 제목만큼, 이 작품은 조밥 자체가 주는 인상이 특별하다. 무대에는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 4개가 놓여 있다. 이 양동이에서는 좁쌀을 한껏 씻은 뒤 밥을 안치는 과정이 반복된다. 노생이 꿈에 젖어있을 동안 밥이 끓는 소리와 함께, 특유의 구수하고 달콤한 밥내가 수증기에 실려 무대를 뚫고 우리의 후각을 자극해온다. 현실로 돌아온 노생을 기다리는 것은 다 익은 밥. 그는 뜸들인 조밥을 가득 퍼 그 어느 때보다도 맛있게 먹는다.
원작에서의 조밥이라는 작은 소재가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여운을 지배한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밥 한 끼를 짓는 시간-꿈속에서의 일순간을 부각하고자 한 연출의 의도가 잘 녹아들었다고 생각한다. 조밥은 청각적으로나 후각적으로, 또 시각적으로 분명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렇지만 왜 하필 밥을 짓는 순간일까.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결국 죽음으로 허무하게 끝나는 노생의 한 자락 꿈은 겨우 밥 한 끼를 채 짓지 못한 사이에 일어났다. 한 사람의 일생을 겨우 밥 짓는 시간과 대비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너무나도 짧은 시간임을 부각한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밥 짓는 데 할애하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이는 역발상인 것이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성어처럼 일생에 무엇을 얼마나 누리든 덧없고 허무할 뿐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밥 중에서도, 극 중에서 쓰인 조밥은 사실 맛이 있지는 않다. 쌀밥만큼 곱지 않고 까끌까끌해 어려운 시절 끼니를 겨우 때우기 위한, 밥 중에서도 보잘 것이 없는 음식이다. 이러한 조밥은 ‘대장부가 때를 못 만나 이렇게 구차한 인생을 산다’고 한탄하는 노생을 닮았다. 노생에게 인생의 맛은 조밥 본연의 맛과 같이 아무런 맛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먹기 위해 먹듯, 살기 위해 살아가는 심정이다.
노생이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주막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갓 지어진 조밥을 먹는 노생의 모습은 어딘가 다르다. 허겁지겁 조밥을 먹는 그의 모습은 그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함이 아닌, 진정으로 맛있게 먹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조밥의 맛이 달라진 것은 결국 노생의 마음가짐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모든 집착과 환상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현재에 만족하며 감사하게 된 노생. 그가 새로 맛보게 된 그리고 앞으로 맛보게 될 인생의 맛은 새로이 느껴지는 조밥의 맛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밥을 짓고 먹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밥은 우리 삶의 가장 기본이자 소중한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쌀을 안치기까지의 시간-밥이 지어지고 있는 시간-쌀이 익어 먹기까지의 시간‘은 밥을 먹기 위해 어느 하나 빠뜨릴 것 없이 중요한 순간들이라 할 수 있다. 극 중 꿈이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연결하고, 또 현재의 삶을 있게 한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들이 어찌 되었든, 밥을 먹고 맛을 느끼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에게 달려있다.
공연이 끝나고 극중 지었던 조밥을 작은 컵에 담아 관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극중 구수한 밥내를 맡으며 배가 고팠던 터라 필자 또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작품의 제목, '꿈을 요리하다'도 이러한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각자의 삶을 요리하는 과정과 거기에서 맛보게 될 맛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일생을 살며 맞닥뜨리는 매 순간, 또 나름대로의 새로운 맛을 찾으며 나아가는 순간 그 자체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나가는 현재에 가장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한편 이 극은 현재를 나타내는 의미로서의 ‘물’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무대 한 편에 배치된 수조에는 물이 가득 차있을뿐더러 물고기가 몇 마리 있었다. 이 수조에 돌을 놓고,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일들은 극의 진행과는 별개로 이루어진다. 즉, 극 중 무대에 두 개의 시공간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노생은 이 수조의 물로 세수를 하며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에서 언급된 조밥을 짓는데 많은 물이 사용되었고, 이는 모두 꿈이 아닌 현실이었으며 우리의 일상과 겹친다. 이렇듯 무대에 수조라는 별개의 공간을 배치하여 꿈속과 현실을 잇고, 또 이 옛 고전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연결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상업 연극과 예술 연극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고 그저 과거와 연결된 이 시대의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연출가의 말을 되새기며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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