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연극 '아버지와 아들' : 다른 듯 닮아있는 존재들의 관계에서 [공연예술]

글 입력 2015.09.22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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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버지와 아들>
                      
: 다른듯 닮아있는 존재들의 관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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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에서 프리엘은 아버지-아들 세대의 ‘다름’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들 사이의 ‘닮음’을 찾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성열 연출



 '아버지와 아들' 은 ? 

 러시아의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원작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아일랜드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엘이 희곡으로 각색 번역한 작품이다. 일상을 토대로 한 플롯, 극의 전달 방식에서 후대의 러시아 극작가인 안톤체홉의 작품과 유사하다고 일컬어진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반 투르게네프가 체홉에게 영향을 끼쳤고, 
‘아일랜드의 체홉’이라 불리는 프리엘 또한 이 작품에 체홉의 느낌을 담아 각색했다는 것이다.



시대적인 배경

  극은 19세기 중반 러시아가 그 배경으로, 크림전쟁(1853-1856) 이후 귀족이 몰락하고 농노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시기를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는 오랜 사회질서, 관습이 와해되자 기존의 권위와 가치를 부정하고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갈망하는 신 지식인층, ‘인텔리겐치아’가 등장한다. 
이들 대부분은 몰락한 귀족이나 학생 등 중간적인 사회계층이었다.
  극중 이러한 인텔리겐치아 계층인 바자로프와 아르까디는 니힐리스트로 묘사된다. 니힐리스트의 사상 니힐리즘은 본래 라틴어의 ‘무(無)’를 의미하는 니힐(nihil)이 그 어원으로, 허무주의를 뜻한다. 하지만 극중 니힐리즘은 단순히 도덕규범이나 문화, 가치관을 부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과학과 이성에 따라 행동하며 사회변혁을 꾀하는 혁명적 민주주의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  차이와 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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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의 제목이 상징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부각시킨 것은 단연 바실리와 바자로프 부자(父子)이다. 냉철한 머리로 모든 것을 과학과 이성의 논리로 바라보려는 바자로프에게 감정표현은 불필요한 사치이다. 그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그가 가족을 외면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단 한 번도 따뜻하게 대하는 법 없는 매정한 바자로프를 언제나 아들로써 사랑하고 받아주는 사람은 부모뿐. 누구보다도 아들 바자로프를 잘 알며, 믿고 따르는 아버지 바실리의 한결같은 마음은 그의 대사로 표현된다.
 

“난 내 아들을 숭배한단다……난 기쁨이나 반가움조차 표현할 수 없었어. 왜냐하면 그 애는 그런 작은 감정 표현조차 혐오하잖아.”


  아들의 학교생활을 그의 친구인 아르까디에게 전해 들으며 아이처럼 기뻐하던 아버지, 천주교 기도시간에 함께 참석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기쁨을 차마 숨기지 못했던 아버지, 내일 당장 집을 떠날 것이라는 말에 못내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 그리고 아들에게 사랑한다 말 한마디를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았을 아버지. 그런 바실리의 모습에서 부정(父情)이 가슴깊이 와 닿는다.
  작품 속 ‘닮음’이라는 메시지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간극이 결코 좁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불현 듯 바자로프가 발진티푸스가 유행하는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도와 의료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와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가 치료를 돕다 목숨을 잃게 되기까지, 그동안 닫아온 문을 조금씩 열며 그는 아버지를 향해 가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성과 감정, 차이와 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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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중 인물들은 대부분 입체적이다. 본래의 성격이 변화하거나 은연중에 다른 이면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점은 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라 할 수 있다.
  니힐리스트 바자로프는 아이러니하게도 자본가이자 과부인 ‘안나’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계급과 사랑을 철저히 배척하던 그가, 자신의 철학과 이념에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을 한 것이다. 한편 극중 귀족사회의 기성세대를 대표하며 도덕을 중시하는 파벨 또한 집안의 하녀이자 동생의 아내가 될 페니치카를 흠모한다. 머리가 말하는 이성과 가슴이 느끼는 감정이 충돌하며, 인간의 본능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한편 바자로프는 이러한 사랑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보임과 더불어 모순된 행동을 보인다. 이를테면 계급을 부정하는 그가 아버지 바실리의 집에서 일하는 하인을 보고도 잠자코 있는 모습, 친구 아르까디에게 ‘귀족 신분으로는 혁명의 자질이 없다’며 기존 신분제의 잔재가 된 열등감을 내비친 점이 바로 그렇다.

  바실리는 식사 중 찾아온 환자를 도로 돌려보내는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반대로 자신의 집을 찾아와 머무는 가난한 아이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따뜻함을 지녔다.
  바자로프의 죽음 뒤 아르까디는 그의 니힐리즘 사상과 혁명 정신을 자신이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바자로프가 했던 그대로 행동하겠다는 아르까디는 정작 가족인 파벨을 떠나보낼 때 함께 슬퍼하고 위로한다.
 이러한 인물들을 위선적이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들이 보이는 행동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었을까. 이념과 신념이 결코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인간의 본성이 이끄는 감정에 충실할 수 있음을 보여준 그들이다.

   잠깐 말을 건네면 금방이라도 열변을 토할 것 같은 바자로프. 그는 변혁에 대한 불꽃같은 열정과 한없이 꺼질 것만 같은 무(無)의 격정적인 삶을 살았지만,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이 꺼지자 금세 시들어버린 인물이다. 그런 그를 시대가 만들어낸 사상가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에 온몸을 바칠 수 있는 열정을 가진 그저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어 보인 청춘의 모습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과 현실, 차이와 닮음 

  바자로프의 마지막 생은 그가 추구해온 이상에 비해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전염병 진료를 하다 감염이 되어 사망한 그의 마지막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친구 아르까디에 의해 추모되고 기억될 뿐이다. 바자로프가 죽은 암울한 상황 뒤에도 극중 다른 인물들은 결혼식을 올리며 축제를 벌인다. 무언가 다들 들떠있지만 불안해 보이는 낯선 분위기를 풍긴다.
 
  마지막의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장면에 대해 필자는 그 자체가 바자로프의 생, 그리고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고 생각하였다. 행복해보이지만 금방이라도 그 행복이 깨질 것만 같은 나약한 불안감, 완전해보이지만 완전치 못한 내면의 신념, 높은 이상과 불완전한 현실이 불러오는 괴리가 그 이질감과 위화감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느꼈다. 또한 슬픔과 혼란의 상황에서 모두가 즐겁게 춤을 추고 노래하는 장면,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날 함께 결혼식을 올리는 아이러니한 상황 자체가 모두 무의미하고 허무한 무(無)로 수렴되고 있다고 느꼈고, 그런 점에서 무(無)로 돌아간 바자로프의 마지막 모습, 이상이 상실된 현재의 삶을 닮았다. 





< 참고 및 사진출처 >
-플레이디비, 연극 '아버지와 아들' 공연사진
-'아버지와 아들' 프로그램북 및 교육자료


[심한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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