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혼란·고독·파멸·죽음의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 [문학]

글 입력 2015.02.17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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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단 사실만으로도 위로 받는 순간이 있다. 이렇게 힘든 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때. 나에겐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자전적 소설이 그러했다.

 

베른하르트는 오스트리아 현대 문학에서 손 꼽히는 인물 중 하나이지만 한국에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국내에서오스트리아 문학의 인지도가 높지 않기도 하고, 그의 소설이 쉽지 않은 탓도 있다. 하지만 유명하지 않아서, 인기가 없어서 모르고 지나치기엔 좋은 작가라서꼭 한 번 소개하고 싶었다.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다”


주요테마가 질병, 혼란, 고독, 파멸, 죽음, 정신착란이다. 이것만 봐도 소설의 무거움이 전해진다. 1968년 오스트리아 문학 대상을 받을 때 그가 한 수상 소감도 평범하지 않다.


“세상엔 칭찬할 게 아무것도 없으며, 저주할 것도, 고소(告訴)할 것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우스꽝스러운 것은 많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우스꽝스러우니까요.”


책날개에 적힌 작가소개도, 책 뒤표지에 적힌 책 소개도 재미있지는 않다. ‘그의 작품들은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신 꼭 읽어 볼 만한 매우 가치 있는 책들이다’라는 말 그대로다. 재미 같은 건 없다. 기승전결도, 갈등도 절정도 하이라이트도 없다. 그저 화자의 의식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될 뿐이다.


자전적 소설 5부작은 사생아로 태어나 외조부 밑에서 자란 그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머니에게 미움을 받은 것, 김나지움에서의 기숙사 생활, 김나지움에서 나와 지하 식료품점에서 수습생활을 한 것, 늑막염으로 결핵 요양소 생활을 하는 도중 접한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부고 등 삶의 의욕을 꺾기도 하고 삶으로 향한 의지가 우세하기도 했던 삶을 그렸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살아내질 이 모든 삶은, 실존하게 될 이 모든 실존은 방해된 삶이거나 방해된 실존이며, 파괴된 삶이거나 파괴된 실존이고 그리고 무화된 삶이거나 무화된 실존이다.”

<원인> 中

 

내용 못지 않게 문체도 쉽지 않다. 철저하게 내면에 집중되어 그 어떤 대화도 등장하지 않는 독백 주의도 낯설다. 반복되는 문장, 한 페이지의 절반을 차지하는 긴 호흡의 문장. 낯선 문체와 쉽게 읽히지 않는 문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몇 장 읽다 말고 역자를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 한 권을 읽고 그의 다른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그때 아무런 막힘없이 책을 읽었다는 걸 떠올렸다. 처음엔 낯설고 어렵지만 한번 발을 들이면 그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정신은 실종되고 환상은 학대받는 이 시대의 기형물들"

"…마침내 반항적이고  공예품 같은 인간 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을 때까지 때리고 깎아 내리기를 거듭한다."

<지하실> 中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특유의 냉소와 풍자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의 유머는 그의 주제만큼이나 부정적이다. 문장에서 비난의 뉘앙스를 지울 수가 없다. 웃음의 유머가 아니라 비웃음의 유머였다. 냉소적인 시선으로 마주한 부조리에 대한 무력, 거부, 극복 따위를 웃음으로 치환한다. 작가가 죽음과 부조리를 초월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의 냉소와 풍자. 무겁고 부정적인 책에서 재미를 느꼈다면 그건 분명 작가의 해학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거듭해서 (실제에 있어서나 생각에 있어서나), 그리고 종종 그 이유가 뭔지도 모르는 채, 이곳에서 내가 기대할 것은 전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뭔가를 기대하면서, 결국 치명적인 심리적 정서일 뿐인 이 정신 및 감정 상태에 순간적으로 잠겨 들어간다."

<원인> 中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나 자신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장차 무엇이 되려 하는지는 나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나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유용한 존재가 되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아무 길도 걷지 않은 인간이다. 다분히 무한하고 무의미한 길을 걸어가는 것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지하실> 中


그의 존재에 대한 고뇌가 좋았다. 책을 읽고 있으면 불분명하게 뇌 속을 부유하는 것들이 정리되었다. 책을 추천받으면서 '일기를 읽는 것 같다'는 코멘트를 들었다. 내 감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의 잃어버린 나의 존재의 마침표.'라는 구절에선 내가 활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책에서 극복하였다거나 극복하지 않았다거나 굴복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책의 결말은 그의 의식의 흐름의 끝이다. 누군가는 그게 싫을 수도 있다. 줄거리가 뭐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어렵다. 마치 사람의 삶처럼. 누군가에게 인생을 물어봤을 때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어떠한 사건이 있었고 지금은 그렇거나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의 책의 마지막처럼. 


누구나 한 번쯤 길을 잃는다. 다리는 아프고 바닥은 진창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걸 알면서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입에서 절로 힘들다는 말이 나온다. 어둡고, 고독하고, 아프다. 그의 말마따나 존재가 '이미 파괴되었고 전멸된 것'같을 때가 있다. 


그렇게 자신의 실존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면, 그래서 혼란스럽다면.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책을 펼쳐보는 건 어떨까. 내게 그러했듯 그의 글이 누군가에게도 위로가 되길 바란다.





그의 자전적 소설은 5부작은 『한 아이』, 『원인』, 『지하실』, 『호흡』, 『추위』로 범우사에서 출간되었으나 현재 『원인』과 『호흡』을 제외한 나머지는 절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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