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가득한 오후, 하이드 파크와 접해 있는 켄싱턴 가든에서 서펜타인 호수를 따라 걷다 보면 전시 공간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y)를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서 지난 3월부터 오는 8월까지 한 화가가 1년 동안 담은 프랑스 소도시 노르망디의 풍경이 펼쳐진다. 화가의 이름은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는 퀴어, 사진, 회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의 최신작을 선보인다.
노르망디에서 담은 1년의 기억, “A Year in Normandie”


A Year in Normandie, 2020-2021. 사진: 직접 촬영
흰 배경에 앙상한 나뭇가지와 땅에서 돋아난 약간의 풀. 겨울을 지나갔지만 여전히 찬기가 남아 있는 초봄의 쌀쌀한 공기가 느껴진다. 그럼에도 꽃눈들은 한 해의 온기를 맞이하기 위해 나뭇가지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언젠가는 따스한 계절이 올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꽃을 피우기 위해 꿋꿋이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하늘의 색이 선명해지고 낮이 길어질 무렵, 드디어 활기찬 봄이 왔다. 작은 나뭇잎과 봄꽃들이 옹기종기 피어나고 앙상했던 나뭇가지도 물기를 머금고 뻗어 간다. 나무 위의 오두막에는 매년 누군가의 따스한 추억이 담길 것 같다.



A Year in Normandie, 2020-2021. 사진: 직접 촬영
시간이 지나 노르망디의 하늘은 더운 공기로 가득 찼다. 땅과 나무는 짙은 초록빛으로 뒤덮이며 생명, 공기, 물의 기운이 폭발하듯 순환한다. 모든 것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할 무렵, 어느 날 자연의 기운을 식히듯 거센 소나기가 내렸다. 그것은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거두어 가는 시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 같기도 했다.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무르익은 성숙의 빛깔이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잘 익은 과일, 추수가 끝나고 돌돌 말린 볏짚, 서서히 물드는 낙엽은 이번 해에도 열성을 다해 푸르렀던 노르망디의 자연에 감사 인사를 하는 듯했다. 호크니도 그림 속 비어 있는 의자에서 그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을까.

A Year in Normandie, 2020-2021. 사진: 직접 촬영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푸르른 녹음 대신 새하얀 눈이 온 마을을 뒤덮었다. 나무는 다시 앙상해졌지만 살포시 내려앉은 눈이 이불처럼 그들을 덮어준다. 시간이 지나면 눈은 녹아 내리고 가지 위에 돋아나는 꽃눈들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됨을 알릴 것이다.
이 그림들은 호크니가 2020년부터 2021년까지 프랑스의 소도시 노르망디의 스튜디오에서 1년간 머물며 남긴 아이패드 드로잉 “A Year in Normandie”의 일부다. 전시장 벽면을 둘러 이어진 100장 이상의 드로잉을 따라 걷다 보면 호크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노르망디의 사계절을 느낄 수 있다. 호크니는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와 14세기 중국 회화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이 기록된 직물이다.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유물이다. 직물 속에 묘사된 화면은 정형화된 구도가 아닌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A Year in Normandie” 또한 호크니에게 ‘사건’으로 다가왔던 순간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꽃눈이 돋아나는 초봄의 나뭇가지, 따스한 봄날 누군가가 머물다 갈 나무 위의 오두막, 세차게 내린 한여름의 소나기, 차가운 공기를 뚫고 무더위를 거쳐 결실을 맺은 탐스러운 과일 나무, 물소리가 들리는 울창한 숲은 그가 노르망디에서 목격한 잊지 못할 순간들일 것이다. 호크니는 이 기억을 토대로 화면을 재구성했다. 서로 다른 풍경이 하나로 이어지며 연출된 자연환경의 비대칭 구도와 계절감을 전달하는 봄과 겨울의 쌀쌀한 공기를 표현하는 여백, 나뭇가지를 표현한 과감한 스트로크는 명나라 절파*의 화풍을 연상케 했다.**
*절파는 초기 명나라 시대에 남송의 궁정화풍을 공유한 직업 화가들의 계열을 의미한다.
**서펜타인 갤러리는 호크니가 ‘14세기 중국 회화’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절파의 화풍이 연상되었다는 것은 에디터의 개인적 견해다.
‘가까운 것’으로 향하는 시선

Jack Ransome Resting on an Orange and White Checkered Tablecloth사진: 직접 촬영
노르망디의 풍경이 이어진 벽면의 중앙에는 호크니가 2025년에 작업한 5점의 초상화와 5점의 정물 추상이 있다. 초상화에는 증손자 리처드 호크니(Richard Hockney), 안경사 잭 랜섬(Jack Ransome)등 호크니의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그림 속 식탁은 일반적인 원근법을 따르지 않는다. 가까운 쪽보다 인물이 앉은 반대편이 넓어 보이고, 체크무늬 식탁보로 인해 이 왜곡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누군가와 마주 앉았을 때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가까이 있는 식탁 모서리보다는 반대편에 앉아 있는 상대를 향한다. 호크니의 회화에서 사물의 서열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가까움보다 심리적 가까움이 아니었을까.
주체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We Two Boys Together Clinging, 1961. 사진: 영국예술의회, 사우스뱅크 센터, 호크니 재단
호크니가 세계를 경험하며 형성한 기억과 관계는 언제나 그가 화폭에 담는 대상과 표현하는 방식의 시작점이 되었다. 회백색의 어두운 바탕, 거칠고 불균질한 붓질, 동성애적 욕망을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이미지. 이번 서펜타인 갤러리의 호크니 전시와는 사뭇 다른 반항적인 화풍의 그림 속에서 두 남성의 형상은 애틋하게 서로를 향하고 있다. 이 작품은 호크니의 초기작 “We Two Boys Together Clinging”이다. 1961년 영국에서 남성 간의 성적 행위가 범죄였던 시절, 호크니는 작품에서 자신의 욕망이 향하는 대상을 과감히 드러내었다.

Still Life Blue Guitar 4th April 1982, 1982. 사진: 호크니 재단
사진은 대상을 바라보고 기억하는 방법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방법론으로 발전시킨 매체였다. 1980년대 호크니는 대상이나 풍경을 부분적으로 촬영한 약 70~150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이어붙여 하나의 화면으로 만드는 작업들을 선보였다. 작품의 매체는 사진이지만 그는 그것을 ‘카메라를 활용한 드로잉’이라 표현했다. 작은 사진 조각 안에 부분적으로 찍힌 대상들은 한 폭의 정물화, 한 폭의 인물화, 한 폭의 풍경화가 되는데, 이는 마치 일상의 부분적인 장면들을 끊임없이 포착하며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의 시선을 옮겨놓은 듯하다.
“When you draw from the eye, you’re drawing from memory. Memory of five seconds ago, a memory of ten seconds ago, a memory of a minute ago. If you think about it, it’s all memory.” (당신이 눈으로 보고 그리는 것은 당신의 기억을 통해 그리는 것이다. 5초 전의 기억, 10초 전의 기억, 몇 분 전의 기억.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전부 기억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
이번 서펜타인 전시 서문에 적혀 있던 호크니의 발언이다. 호크니는 앞서 소개한 작품 외에도 대표작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 등 퀴어, 사진, 추상, 팝아트, 인상주의 등 다양한 사조를 넘나들며 작가적 실험을 이어왔다. 그 과정에서 언제나 전제가 되어 왔던 것은 주체의 인식이었다. 노르망디의 풍경, 초상화에 담긴 인물의 모습은 호크니의 기억을 투영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아이패드로 빠르게 옮긴 1초 전의 풍경도 인식과 기억을 통해 재구성된 결과물이다.
호크니의 마지막 여정을 찾아서
호크니의 작업은 한 가지 화풍으로 정리하기 어렵다. 초기 퀴어 회화의 거친 붓질과 문자, 캘리포니아 회화의 명료한 색면, 사진 콜라주의 파편화된 시점, 아이패드 풍경의 연속적인 시간 등 수십 년의 경력을 통해 수많은 매체와 방법론으로 자신만의 작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일관된 질문이 있다. 세계는 한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그리고 인간의 경험에서 형성된 기억과 욕망은 어떻게 평면 위에 남겨질 수 있는가.
서펜타인의 예술감독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 호크니는 언젠가 서펜타인에서도 그의 여정이 이어지기를 기약했었다. 호크니의 희망대로 2026년 3월 서펜타인 북관에서 그의 전시가 열렸다. 그러나 전시가 진행되던 지난 6월 12일, 호크니는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노르망디의 1년을 담은 파노라마와 10점의 회화는 호크니가 주체로서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탐구한 여정의 마지막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호크니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현재 서울 용산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은 현대미술 소장품 특별전 “APMA, CHAPTER FIVE”를 개최 중이다. 이곳에서 호크니의 석판화 “카리브해의 티타임”을 만나볼 수 있다. 기고문에서 다루지 않은 호크니의 입체파적 탐구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제는 별이 된 동시대 고전의 발자취가 궁금하다면 이곳을 방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