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지전능한 신처럼 꿰뚫어 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진리 불변의 법칙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가끔씩 마치 나의 모든 사고가 낱낱이 간파당하는 듯한 비이성적인 두려움과 압도감 앞에 놓일 때가 있다.
여기 릴리안은 프랑스 파리의 한 건물에서 진료를 보는 정신과 의사다. 그녀는 빈틈없고, 완벽하고, 이성적인 전문의다. 예약 시간에 맞춰 아늑하게 꾸며진 상담실 안으로 들어오는 환자들은 그런 릴리안에 이끌려 상담실 한편에 편안하게 몸을 누인 뒤, 마음 깊숙한 곳에 숨기고 있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남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속내들이 릴리안의 앞에서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 툭 풀어 헤쳐진다. 정신과 의사인 릴리안에게 누군가의 ‘사생활’이란 그토록 쉽다. 그녀는 환자들의 상담 내용을 녹음하고, 그것을 테이프로 기록하고, 날짜를 적어 간직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환자의 사생활은 의사인 릴리안의 소유물이 된다. 그것은 그녀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권리다.
그 평온한 일상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이었다. 그녀가 9년 동안이나 봐온 환자인 폴라가 갑작스레 죽었다는, 그야말로 릴리안의 세계를 뒤집어버린 소식.
<파리의 사생활>은 미스터리하면서도 경쾌한, 감각적인 추적극이다. <양들의 침묵>, <패닉 룸> 등을 통해 아카데미를 2회 수상하며 연기파 배우로 이름을 알린 조디 포스터가 정신과 의사 릴리안 역을 맡았고, <카페 벨에포크>로 유명한 다니엘 오테유가 그런 릴리안의 전남편이자 조력자인 가브리엘 역을 맡았다.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죽은 환자 폴라 역은 올해 제79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비르지니 에피라가, 폴라의 남편 시몽 역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마티유 아말릭이 연기했다.
또한 제66회 칸영화제에서 <그랜드 센트럴>로 프랑수아 샬레상을 수상했던 레베카 즐로토프스키가 감독을 맡았으며, 제78회 칸영화제에서도 이번 작품을 상영한 후 작품과 감독 모두에서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국내에서는 오는 7월 15일 개봉될 예정이다.
레베카 감독은 이번 작품을 두고 “침묵에 빠진 여자와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직업이었던 여자에 대한 영화”라고 밝혔다.
환자들의 속사정을 들어주는 일을 하는 릴리안은 자신이 알고 있던 폴라의 행동과는 너무나 다른 이 갑작스러운 소식에 의심이 들어 곧바로 그녀의 집을 찾아가 보지만, 영원한 잠에 빠져 고요히 누워있는 폴라는 입을 여는 법이 없다. 상담을 위한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 까다로운 내담자는 많았지만, 그것이 아예 불가능한 내담자는 릴리안으로서는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 같이 답이 보이지 않는 존재다. 더욱이 폴라가 죽을 당시 릴리안이 처방해준 약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아내의 죽음에 릴리안의 책임이 있으리라고 믿는 남편 시몽의 분노와 경계심으로 인해 간단한 접근조차도 쉽지 않다.
하지만,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시죠?” 폴라의 딸 발레리의 은밀한 접촉에 더해 “그이는 내가 없어지길 바라요.” 과거 상담 중의 폴라의 의미심장한 하소연을 기억해낸 릴리안은 폴라의 죽음이 남편에 의한 타살이라고 결론 내린 뒤 직접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국내에서는 <파리의 사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하지만, 사실 이 영화의 원제는 A Private Life, 즉 ‘사생활’ 그 자체다. 그렇다면 감독은 누구의 사생활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역시 이 긴 추적극의 대상이 되는 폴라의 사생활일까? 하지만 영화가 점차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우리는 폴라의 사생활을 파헤치면서 결국 그 행위를 하는 자신의 사생활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 릴리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네모나고 폐쇄적인 방. 매일 똑같은 가구들의 위치. 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상담 공간으로 얼굴과 예약 시간만 다른 내담자들이 마치 기계가 돌아가듯 줄을 지어 찾아온다. 그때마다 릴리안은 똑같은 안내를 반복하고, 녹음기를 켜고, 사회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이야기에 응답한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환자들에게 진실한 관심을 기울이거나 애정을 가지는 모습은 작품 내에서 그려지지 않는다. 어차피 언제든 다시 들을 수 있도록 녹음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상담하는 그 순간에 크게 집중할 필요도 없다.
릴리안은 자신이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단단한 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확신을 일부러 굳힌 뒤 이를 마치 갑옷처럼 두르고 주위를 경계하는 겁쟁이에 가깝다. 처음 보는 사람들의 사생활을 수집하고 마치 이해하는 척 행동하며 그것을 직업으로 삼기까지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의 사생활조차 돌보지 못한다. 남편과는 이혼했고, 아들과의 사이는 소원하고, 잠든 손자의 얼굴도 들여다보지 않는다.
폴라의 죽음을 추적하는 위험한 과정 역시 릴리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홀로 시작한다. 하지만 수동적으로 흘려보내기만 하던 다른 사람의 인생에 뛰어들기로 몸을 던진 바로 그 순간, 릴리안의 세계는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 단계 넓어졌다. 처음에는 그녀가 바라본 폴라의 사생활만큼, 그 뒤에는 헤어진 뒤 다시 만났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믿고 조력자가 되어준 전남편 가브리엘만큼, 오랫동안 자신에게 상처를 준 엄마임에도 찾아갈 때마다 여전히 집 문을 열어주는 아들 줄리앙만큼, 그리고 드디어 내려다본 어리고 사랑스러운 손자의 얼굴만큼.
영화의 마지막, 이제 릴리안은 상담하며 녹음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찾아온 내담자의 곁에 앉아 그를 내려다본다. 귀를 기울이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 누군가의 사생활을, 여지없이 자신의 세계를 또 한층 넓혀줄 교집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