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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뮤지컬 <종의 기원>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인칭 한유진 시점, 소설 <종의 기원>
소설 <종의 기원>은 독자에게 사이코패스의 변론을 끝까지 듣게 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사이코패스 한유진의 심리에 따른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된다. 정유정 작가가 “이 소설은 한유진이 세상에 펼치는 자기 변론이 돼야 했다.”(이은선 기자, <소설 '종의 기원' 정유정 작가 인터뷰>)라고 밝힌 것처럼, 독자는 소설을 읽는 동시에 그의 변론을 들어야 한다. 소설은 독자를 유진의 시점에 가둔다. 독자가 가장 먼저 전달받는 정보는 어느 날 눈을 떴더니 유진의 어머니가 죽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유진을 따라, 소설은 사건을 역행한다. 어머니가 죽은 새벽에서, 어머니가 써 온 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지난 10여 년을 지나, 유진의 형 유민이 죽은 16년 전의 진실까지. 독자는 한유진이라는 악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유진이 ‘기억하지 못함’에서 ‘기억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함께 밟아가며, 소설 제목 그대로 ‘종의 기원’을 탐구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일종의 트릭으로 작용한다. 그가 누구를 죽였는지, 어젯밤에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하는 사건의 전말을 독자와 유진은 동시에 알게 된다. 피의자의 변론을 듣고 그가 무죄일 수도 있겠다고 잠정하던 변호인이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에 배신감을 느끼는 것처럼, 유진의 변론은 독자를 여러 번 배반한다.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엄마와 이모의 단정적인 진단으로 인생이 망가졌다고 억울해하는 유진의 목소리가 점점 가증스럽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소설이 설계된 이상 독자는 그의 목소리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면서 이 ‘1인칭 한유진 시점’은 끝내 악을 목도하게 한다. 유진이 최상위 사이코패스인 ‘프레데터(포식자)’이고, 형마저 고의로 죽였다는 사실이 결말부에서 밝혀지지만, 그는 친구 해진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고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사이코패스는 또 다른 사람을 해칠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미 그는 재판장을 빠져나간 지 오래다.
![[이미지1] 2026 종의기원 메인 포스터.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7/20260714152732_cnyfgzuz.jpg)
3인칭 관객 시점, 뮤지컬 <종의 기원>
2022년 소설을 무대로 옮겨온 뮤지컬 <종의 기원>은 다른 선택을 한다. 창작자들은 작품을 다른 장르로 옮길 때 그 장르 양식에 맞게 원작을 번역해야 하는데, <종의 기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뮤지컬만의 형식을 고민했을 <종의 기원> 창작자들은 두 명의 유진을 등장시키기로 한다. 한 명은 유진, 또 다른 한 명은 ‘리모트’ 약을 먹지 않을 때만 나타나는 유진이다. 이는 그동안 여러 뮤지컬이 취해 온 방식이기도 하다. 2인 1역으로 한 캐릭터를 표현하거나, 죽음, 원고지처럼 관념화된 캐릭터 등장시키는 등 배우와 무대라는 물성을 통해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하는 것은 무대 예술의 유구한 방식이다.
그렇다면 왜 유진을 2인 1역으로 세운 것일까? 소설에서 “청군”과 “백군”으로 지칭되는 유진의 머릿속 상반되는 입장이 2인 1역의 실마리가 되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시점이 있는 소설이나 카메라가 있는 영화와 달리, 뮤지컬은 대화와 음악으로 이루어진다. 시점 자체가 한유진에게 못 박혀 있는 소설을 무대화할 때, 한 배우의 독백과 독창만으로는 그의 복잡한 내면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한 사람의 변론이 아닌,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사이코패스 유진의 사고를 직관적으로 보여 준 것일 테다.

이미 뮤지컬에서는 익숙한 문법이지만, <종의 기원>은 몇 가지 선택을 달리한다. 보통은 2인 1역이었다는 게 작품의 큰 반전 포인트가 되는데, 이 작품은 처음부터 2인 1역임을 노출한다. 또한, 작품 초반에 유진이 살인자임을 밝히는 것이나 어머니의 죽음부터 사건을 역행해 가는 것도 같은 계보의 뮤지컬과 비교했을 때 신선한 점이다. 이는 원작을 충실히 반영한 덕이다.
두 유진이 선과 악, 이성과 충동 등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한유진1이 메인 캐릭터처럼, 한유진2가 또 다른 자아처럼 등장하지만, 누구 하나가 살인 충동을 떠맡지 않는다. 이러한 접근은 ‘한유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긴장을 만든다. 악에 굴복하는 선, 이성을 잠식하는 충동이 아니라, 누구 하나가 돌발 행동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두 자아이기 때문에 관객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좇게 된다.
특히 브랜든 리의 음악은 2인 1역을 적극 활용하며, 작품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음악은 유진에 관한 긴장을 유지하며 미스터리의 온도를 잘 맞춘다. 첫 넘버 ‘리모트’에서는 미스터리함과 서정적인 느낌을 살리며 작품의 톤을 극단적이지 않게 조율한다. ‘빗속의 살인’ 같은 넘버에서는 탱고 풍의 선율을 섞어 장면의 그로테스크함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안무가 들어갈 여지도 만든다. 작품의 시작과 끝에서는 유진이 물속에서 느끼는 해방감이 강조되는데, 유진 개인에게는 억눌렀던 자아를 해방하는 서사인 동시에,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그 해방이 곧 위협이 되는 서사 사이의 음악적 균형을 잘 맞췄다는 인상이다.
대화에서 선포로, 한유진을 '보여 주기'
다만, 뮤지컬이 2인 1역을 통해 한유진을 ‘보여 주는’ 방식은 소설의 트릭을 다소 약화한다. 가령, 유진이 형을 죽였다는 사실은 마지막 반전이지만, 유진이 둘로 나뉘어 있는 이상 큰 반전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미 한유진이라는 인물을 만드는 두 배우의 긴장감이 그것을 기정사실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이코패스 한유진’은 엄마와 이모의 규정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종이었던 것인가 하는 작품 후반부의 질문에는 큰 동력이 없다. 두 자아 모두가 살인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후자가 아닌 게 이상할 정도이다.
이는 유진의 거울 캐릭터인 해진의 힘이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올곧게 선한 태도를 유지하는 해진은 원작에 비해 다소 평면적으로 구현된 감이 있다. 소설에서는 유진의 시점에 의해 ‘복잡하게 착한 사람’ 같이 비치던 해진은 뮤지컬에서는 ‘단순하게 착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후반부 유진과 해진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 그다지 치밀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재연부터는 ‘가야 할 길’ 넘버를 추가하며 해진과 유진 사이 긴장감을 보완하려 했지만, 여전히 해진의 역할은 주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이는 작품의 한계라기보다 장르 양식에 맞는 선택의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소설이 유진의 머릿속에 독자를 가둔 채 '악'을 체험하게 했다면, 뮤지컬은 그 악을 둘로 나누어 강렬하게 보여 주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소설이 독자를 한유진의 변호인 자리에 세워 계속해서 배반당하도록 만들었다면, 뮤지컬은 그를 보다 멀리서 응시하는 방청객의 자리에 세운 것에 가깝다. 덕분에 관객은 뮤지컬만의 긴장감으로 한유진이라는 인물을 바라볼 수 있다.
뮤지컬의 커튼콜이 끝나면 에필로그가 이어진다. 도시의 밤거리를 뒤로 하고 유진이 나타난다. 유진은 더 이상 둘이 아니다. 한 명의 유진만이 거리를 걸으며 “긴장해, 평범함을 가장한 비범한 난 어디에나 있어. 너희들 곁 바로 여기.”라고 선포하듯 노래한다. 그리고 모자를 뒤집어쓰고는 객석으로 퇴장한다. 마치 군중 속 익명이 되려는 듯이. 소설이 변론이었다면, 뮤지컬은 대화로 시작해 선포로 끝난다. 타인의 절망을 즐기는 '악'은 우리 곁에 있다는 선포. 끝내 '악'과 방청객 사이 거리가 사라지고, 평범한 얼굴을 한 '악'은 우리 곁으로 걸어 들어온다.
*참고
- 이은선 기자, <소설 '종의 기원' 정유정 작가 인터뷰>, 중앙일보, 2016년 7월 8일 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