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에세이] 손바닥을 아래로 두면 여름이 붉어진다 - 더하우스콘서트 줄라이페스티벌 : Artist in Focus 2 - Jean-Baptiste Fonlupt(Piano) [공연]

말없이 노래하는 사람을 한참 바라보았다

by 장유진 에디터
2026.07.14 16:49

 

 

KakaoTalk_20260714_132734855_08.jpg

 

 

어릴 때부터 손발은 늘 따뜻했다. 초등학교든 고등학교든 꼭 내 손을 붙잡아 제 손을 녹이던 친구가 한 명씩은 있었다. 유달리 한기가 가득한 학교 체육관, 인파가 적어 바람 소리가 다 들리는 지하철, 얼어붙은 길 위에서도 차마 주머니 속에 숨길 수 없던 계절 모두.


그때의 일은 다 예전의 것이려나 했는데, 잠시 멀리 유학을 떠나는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오던 길, 친구 하나가 따뜻한 기운을 내보내는 내 손을 눈치채고 차갑게 식어버린 제 팔 안쪽에 가져다 대었다. 아무래도 장난삼아 불리곤 했던 '인간 난로'를 피할 수 없는 게 이번 생인가 보다.


얼마 전, 내 손에 관해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았다. 손을 아래로 두면 손바닥 전체가 다홍빛이 될 정도로 진하게 새빨개진다. 팔을 들어 올리면 금세 하얘지다가도 툭- 하고 바닥을 향하게 두면 다시 붉어진다. 몸이 한동안 따뜻해져 있거나 한참 서 있을 때면, 그 색이 손바닥 안에서 붉게 피어나더라.


그 다홍빛을 다시 떠올린 건 13일 저녁이었다. 익숙하게 드나들던 혜화의 공연장에서, 프랑스에서 온 피아니스트의 얼굴과 손 위로 비슷한 빛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KakaoTalk_20260714_132734855_02.jpg

 

 

에어컨은 모두 꺼져 있었고, 관객들은 오후 8시 전까지 머물다 간 시원한 바람결에 의지해 건반과 옆얼굴과 소리에 집중했다. 얼굴에 피어난 붉은 꽃, 건반 위에 놓이는 선홍색 두드림.

 

그런 마당에 두터운 담요까지 무릎에 두르고 있던 내가, 꼼짝도 못 한 채 그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뭘까.

 

희한했다. 피아니스트의 옆모습을 한참 바라봤는데, 건반 위에서 저 영롱하고 또렷한 소리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옆에서 보기엔 건반을 그리 깊게 누르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선명한 소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을까?


피아니스트는 거의 눈을 감고 있거나 건반 위에만 시선을 주었다. 표정 변화도 없이 고개를 그대로 둔 채 건반과 눈을 맞추는데…… 신기했다. 이렇게까지 '묘사'에 집중하는 연주가도 있구나.

 

 

KakaoTalk_20260714_132734855_08.jpg

 

 

피아노 리사이틀에 가보면 짧은 길이의 곡들이 여러 개 연주되곤 하는데, 미리 아는 곡이 아니라면 지금 어떤 곡을 하고 있고 어디까지 나아가고 있는지 길을 잃기 참 쉽다. 그래서 나는 미리 메모장에 간단한 이정표를 그려다 놓았다.


그의 연주는 그가 우리에게 그려 보이기로 약속한 곡 제목들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러니까 어떤 ‘개성’이나 ‘해석’의 여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텐데, 그는 딱 곡에 필요한 만큼만 물감을 묻히고, 붓질을 하고, 후후- 바람을 불더라.

 


썸네일.jpg

 

 

또렷해질 때를 이미 너무도 잘 알고, 기다려야 할 곳이 어디인지 피아노랑 진작에 긴밀히 소통해 본 사람만 같았다. 한 곡이 끝나거나 다음 악장으로 넘어가는 끝자락이 다가오면 나는 그를 향해 있던 시선을 그의 발끝으로 내렸다. 페달에서 발을 완전히 떼기까지 서서히 물러나는 그 움직임은, 피아노가 제 소리를 다 내고 마지막 여운을 남기는 그때까지 이어지더라.


연주가 아니라, '노래'를 그대로 들여놓으려 하더라. 몸 한 번 꿈쩍하지 않는데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더라. 근데 그가 말하는 곳에 정작 자신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고.


옛 궁정이 잠시 머물다 간 자리엔 사람 목소리가 담겼던 노래가 흐르고, 기도가 자리했다. 새파란 곳에서는 나방이 날갯짓하고, 크게도 못 울다 떠나간 새가 있었다. 일렁일렁 파도 위를 춤추는 하얀 돛단배가 지나가고, 탐스러운 빛깔의 사과 몇 개를 다 먹어치운 어릿광대를 만났다. 그렇게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는 종 하나를 만나게 되기까지……


앙코르로 어미 거위 모음곡 중 제5곡이 나왔을 때에는, 이 곡을 몇 번이나 들어봤음에도 여전히 나는 이 이름을 모르는구나 싶었다. 어디서였더라. 아마 서초였던 것 같은데…… 에이, 뭐가 중요할까. 내가 지금 기분이 좋은 건 우리의 만남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KakaoTalk_20260714_132734855_09.jpg

 

 

공연이 끝나고, 동행과 나는 치즈 두 개와 와인 한 컵을 들고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 다시 조그맣게 앉아 홀짝홀짝 입을 축였다. 에어컨을 꽤 오래 꺼두었던 덕분인지, 원래도 부드러웠던 큐브 모양의 치즈가 입 안에서 말랑하게 녹아내렸다. 이 치즈로 동행을 또 이곳에 데려다 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가와 관객들이 대화를 나누고 사진도 찍는 사이, 내 얼굴에 내 손만 한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음- 밤 10시가 다 된 시간. 이제는 얼굴이 빨개져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이때. 익숙함과 새로운 만남을 잠시 뒤로 한 채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출입문을 열자마자 작년 여름을 떠올렸다. 뜨거운 공기가 한밤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 다홍빛 여름이다.

 

 

  


장유진이 에디터의 다른 글 보기
클래식이랑 서서히 친해지는 중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