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아우슈비츠가 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라는 지옥에서 살아남아, 참혹한 좌절을 분노가 아닌 인간 존엄의 증명으로 승화시킨 인물.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 밖을 나와 세상에 던전 말들을 엮은 책 『죽음의 수용소 이후』에서 그는 시종일관 인간 본연이 추구해야 할 가장 아름다움 지향점, 즉 '의미'를 이야기한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아가지만, 역설적으로 깊은 허무와 권태에 시달린다. 생리적 욕구가 채워진 현대인들은 삶의 유한함과 덧없음에 쉽게 좌절하며, 스스로를 풀기 힘든 숙제 속에 가두어버린다. 프랭클은 이 기묘한 현대병의 원인을 정확히 짚어낸다.
사람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사람들은 과도한 요구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적은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p. 71)
안전한 생존을 보장받은 현대인들은 원초적인 간절함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정신적 가난을 얻었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 사회에서 어떤 쓸모와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지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살아남고 싶은 이유가 없으면,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에 대한 개인적인 간절함이 없으면 살아남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p. 65) 수용소의 진리는 이제 변형된 형태로 발현된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가 좌절될 때, 인간은 가장 즉각적이고 쉬운 도피처인 쾌락과 도파민에 중독된다. 식탐과 절식, 자극적인 소비와 탐닉 등 일차적인 욕구를 극단적으로 통제하거나 해방하는 방식으로 공허함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여기에 SNS의 발달은 비교라는 인간의 취약한 습성을 자극하며 불안을 부추겼다. 현대인들은 '의미 실현'에 강박적으로 도취되어, 나의 하루가 낭비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갓생'에 열을 올린다.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이들에게 프랭클은 어떤 사람에게 가장 힘들게 다가오는일이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작아 보일지 몰라도, 그건 그 사람의 인생에서는 가장 힘든 경험이다. 고통 없는 인생은 없고 그 고통은 다양한 모습을 띤다(p. 11)고 위로를 건넨다.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내 아픔을 재단할 필요가 없다며.
이러한 맥락은 청년들이 겪는 문제에도 맞닿아 있다. 청년들이 구직 과정에서 진정으로 갈구하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수단이 아닌 '소속감'이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 가치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실제로 나도 취준생 시절, 어떤 모임에 속해 정기적인 과제를 수행하고 소통할 때 불안감이 감소하는 경험을 했다. 나 자신을 떠나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는 지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스스로를 내어줄수록, 사랑이든 일에서든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어떤 일에 봉사하거나, 타인을 사랑할수록, 사람은 정확히 그만큼 더 행복해집니다. 행복을 의식적으로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지금 행복한지 아닌지를 따져보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말이지요. (p. 89)
우리는 '행복추구권'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지만, 프랭클은 행복을 목적으로 삼고 추구할수록 행복에서 멀어진다고 꼬집는다.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나를 즐겁게 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나름의 가치를 현재에서 발견하는 것. 그것이 행복의 유무를 결정한다.
결국 빅터 프랭클이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삶의 복잡성에 지나치게 천착하여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 그는 수용소라는 극단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마주해야 할 본질적인 물음을 '존재 자체'에서 찾으라고 권한다. 우리는 거창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며, 누군가에게 이용되거나 비교당하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낸 것 자체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존엄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러니 이제 그의 말처럼 그루터기만 남은 허허로운 밭을 바라보며 덧없음에 취해 우울해하지 말자. 대신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내며 거두어들인, 이미 곡식으로 가득 찬 창고를 바라보며 미소 지어보자. 내 삶의 의미는 먼 미래의 성취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채워나가고 있는 삶의 궤적 그 자체에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