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윙 데이즈_암호명 A>는 일제 치하의 1945년, 유일형이라는 한 인물이 암호명 ‘A’를 받기까지의 일생을 그린 작품이다. 실존 인물인 ‘유일한’ 박사를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이지만, 해당 공연은 한 인물을 무조건적으로 숭배하거나 관객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작품이 아니다. 핵심은 중대한 결심을 내리기까지 개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인간적인 변화와 성장에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두 가지 열쇠, ‘사랑하는 대상의 확대’와 ‘베로니카의 의미’를 짚어 보고자 한다.
I. 유일형의 이야기 - 바람이 사랑을 물고 불어온다.
공연은 잘 나가는 사업가 ‘유일형’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이 얽히며 전개된다. 일형이 살아가며 만난 사람들과 그들로부터 얻은 깨달음, 지키고자 하는 ‘사랑’의 범위가 넓어지는 서사를 지녔다. 내 가족과 친구에서, 유일제약 회사의 직원들과 첩보원들, 평범한 같은 나라의 사람들과 자신보다 앞서 뛰어든 투사들까지 - 사랑하는, 그래서 지켜야’만’ 하는 대상의 확대는, 일형이 ‘성장하는 인물’임을 보여주는 설정이자, 이 이야기가 개인의 영웅담이 아닌 공동체의 연대기임을 드러내는 장치다.
시작은 가족과 친구다. 둘은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찾아 떠난다’는 공통점으로 묶여 연인이자 가족이 되었고, 호메리는 일형이 조국을 위해 미국에 아이와 자신을 두고 돌아갈 때도 묵묵히 그를 지지한다. 한편, 어릴 적 그네를 타며 놀던 세 친구의 과거를 애틋하게 회상하는 장면은 현재 상황과 대비되면서 비극성을 심화한다. 평화롭고 즐겁게 서로를 기다리던 날들과 달리, 현재의 야스오는 일형이 미국 측에 정보를 넘기자 그를 체포하기 위해 회사로 향했다.
그리고 상황을 알아챈 만용은 일형이 아닌 자신이 한 짓이라며 대신 고문을 당한다. 일형이 없으면 무너질 회사임을 알기에, 오랜 친구와 회사에 딸린 많은 식솔들을 지키고자 희생을 자처한 것이다. 야스오 역시 총독이자 아버지인 곤도의 자식으로서도 일형의 친구로서도 온전히 자리하지 못하고 외로웠던 시간을 지나, 일형을 도와 곤도를 끌어내리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친구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내하는 둘의 모습은, 그의 각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회사의 직원들까지 지키게 된 일형은 오래전 베로니카와 함께 있었던 노아를 다시 만난다. 노아는 사랑의 대상이 회사 식구들을 넘어 주변의 사람들까지로 확장하게 만든 인물인데, 자세한 것은 다음 목차에서 베로니카에 대한 언급과 함께 이야기하고자 한다.
II. 베로니카 - 지워지지 않는 영혼의 낙인, 지속적 통증.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베로니카가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이 보이고, 그녀는 어린 노아의 손을 잡고 황급히 일형이 연 파티장으로 숨어든다. 베로니카는 무모하게 굴지말고 쉬라고 말하는 일형에게 “안전한 곳에서 돈 몇 푼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한다.”라는 뼈아픈 일침을 가한다. 이 말은 일형의 마음속에 낙인처럼 새겨졌고, 이후로 그는 베로니카가 남긴 말이 틀렸음을, 자신의 방식도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어 치열하게 고민한다.
베로니카는 선택의 기로마다 살해당한 그날처럼 붉은 조명 아래, 피로 얼룩진 옷(2막 중반부 제외)을 입고 말없이 일형을 지켜본다. 야스오에게 무참히 총살당한 그녀의 실체를 고려할 때, 이후 등장하는 모든 베로니카는 일형의 심리 상태를 투영한 '상상' 혹은 '상징'임을 알 수 있다. 1막과 2막의 끝에서 베로니카가 등장하는 장면을 눈여겨보면 좋을 듯하다.
1막의 마지막 장면은, 카미카제에 동원되는 소년병들의 비극적인 광기를 보여준다. 야스오는 곤도의 명령으로 일형에게 마약성 진통제 납품을 요구했고, 그 의도를 모르던 일형은 고민 끝에 ‘아픈 자국의 소년병들을 위해’ 납품을 결정한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치 못한 파국을 맞이한다. 마약성 진통제의 투입은 치료가 아니라 폭격에 뛰어들 때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려는 용도였고, 상황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젊은 소년들이 열을 맞춰 서서 하나둘 모자를 쓰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일제히 뛰어든다. 계단에 선 베로니카가 애처롭게 소년병들을 막아서는 모습은, 일형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오만에 대한 뼈아픈 자책'이자 광기 앞의 무력함이라고 할 수 있다.
2막에서의 일형은 더 적극적으로 작전에 뛰어든다. 그는 결혼식을 표면적 이유로 삼아 카미카제 정보를 직접 미국에 알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펄벅은 가족도 생긴 그에게 안전을 위해 가지 않을 것을 권하지만, 일형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다며 다시 돌아갈 의지를 피력한다.
결정적으로 미국에서 베로니카의 의지를 이어받은 ‘노아’를 만났다는 점이 중요하다. 노아는 베로니카가 일형과 처음 만난 상해에서 그녀의 옆에 있던 아이로, 일형의 지원으로 잘 자란 후 동양인들로 이루어진 부대에 자원입대했다. 일형은 '가본 적도 없는 조국을 위해' 대학도 버리고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노아와 같은 사람들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노아는 기어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위험한 작전에 자원하기까지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일형은 마침내, 자신의 방법만이 정답이 아님을 인정했다고 생각한다. ‘뛰어들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던 사람들’의 의지를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암호명 A가 되기로 결심한다. 냅코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가족을 뒤로하고 떠나는 장면에선, 이제 일형으로부터 베로니카처럼 ‘뛰어들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던’ 사람들의 굳은 의지가 느껴진다. 아내와 뱃속의 아이에게 안부를 묻는 말과 작전 지시 음성을 리듬에 맞춰 번갈아 들으니, 그가 무엇을 포기하고 이 작전을 하는지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그를 차갑게만 바라보던 베로니카가, 마침내 자신이 손에 쥐고 있던 피로 물든 손수건을 일형에게 건네주고 경례한다. 베로니카에게 머리를 묶으라고 주었던 끈만 붙잡고 머뭇거리던 시절을 지나, 일형은 '확인'을 받은 것이다. 투사들의 의지는 대물림 되었고, 일형은 성장하여 많은 사람을 지키는 사명을 완수했음을 말이다.
Fin. 안녕, 베로니카. 안녕, 유일형.
‘피날레’, 1막에서 세 친구가 타던 그네가 내려온다. 무대 위에는 슬픔 대신 다시 일어나 최선을 다한 '꿈 꾸는 사람들'이 서 있다. 베로니카, 노아, 그리고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조국을 위해 기꺼이 최전선에 뛰어들던 마음은 일형을 점차 변화시켰다. 일형은 많은 사람들을 도왔지만, 사람들 역시 그를 도왔다. 수많은 사람의 간절함이 있었다. 이들의 간절함과 도움이 일형을 변화시켰고,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했다. 전쟁과 혼란, 죽음이 '바람'에 씻겨나가고 남는 것은 결국 내일을 향한 ‘사랑’이다. 그리하여,“꿈꾸던 세상을 향해서 흔드는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