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기어이 여름은 오고야 말았다. 종로5가 역에서 내려 혜화를 향해 걷는 동안 정수리에 내려 얹힌 햇살은 조금씩, 스멀스멀 등줄을 타고 오르는 불길한 기운처럼 기세를 올리더니마는 마침내 임계를 넘어 견디기 버거운 것으로 탈바꿈했다. 목을 내리누르는 그 무게마저 오롯이 느껴지는 듯, 묵직한 태양이 머리를 짓누르고 땀샘은 축제처럼 탄성을 부르짖었다. 그야말로 개처럼 나는 혀를 내둘렀다 허나, 그만큼 녹음은 푸르르는 것이 빛을 받아먹고 사는 잎사귀로서는 더없이 기뻐하는 것이다. 종로5가부터 혜화 사이 연지동, 키 큰 가로수들은 그렇게 좋아 보였다.


극이 시작되기 전에 시놉시스라든지 후기를 미리 읽지 않는 편이다. 순전 귀찮기 때문이다. 대신에 파가니니나 몇 곡 들어둘까 하다간, 카프리스와 라 캄파넬라를 고민해 후자를 택했다. 까닭인즉 캄파넬라에서 뜬금없이 사계의 여름 3악장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뭐랄까, 사계가 그리는 여름의 풍경이 여가와 생동감, 비유하자면 해수욕장의 정경이라기보다는 긴장과 비장함을 형상하듯이, 세차게 내달리며 고조되는 저 선율이 가리키는 바는 여름에 대한 내 감상과도 맞닿아 있다. ‘여름이 곧 들이닥칠 것이다, 헬리오스의 전차를 끄는 말들은 인정도 사정도 봐주지 않고 여름의 극점을 향해 내달린다, 앞에 방해되는 모든 사물을 뚫고 지나가는 위풍당당한 네 마리 말발굽 소리.’ 그러나 굳이 멋없게 이 비유를 좀 더 늘여뜨리자면 그 전차의 기수를 모는 자는 기실 헬리오스가 아니라 파에톤일 것이, 바로 그 때문에 태양은 지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와 모든 걸 태울 것처럼 굴다간 이내 추락해 가을을 부르게 되는 까닭이다.


이렇듯 여름에 대한 내 비유적 감상이 사계에 닮았고, 캄파넬라로부터 사계를 떠올린다. 물론 캄파넬라를 여름 3악장과 곧바로 접붙이는 것이 무리한 처사임을 알고 있지만, 그저 느닷없이 떠올랐다는 사실이 이 서론을 쓰게 한 이유의 전부. 조금 무리해 주장을 이어가자면, 이제 막 시작된 여름의 전주곡으로서는 캄파넬라도 그 몫을 주장할 여지가 있을 터이고, 무엇보다 카프리스보단 캄파넬라가 여름에는 썩 어울릴 것이다. 현란하게 음계를 오르내리는 바이올린 선율 위로, 나는 여름의 관점에서 파가니니를 생각한다.


현을 뜯으며 피치카토를 마음껏 뽐내누나, 집요함과 고집스러움, 완벽주의와 편집증, 오- 일말의 자부심과 자존심도 쉬이 엿보인다. 내게 캄파니니 음악은 우아한 편집증, 마침내 성공한 완벽주의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결국에 기교를 완성함으로써 그 모든 과정상의 것들마저 의미로 바꾸어버린 한 명의 예인이 눈에 선하다. 성공한 기교주의자, 유독 한 손가락이 길고 얼굴은 악마처럼 기괴한 그 사람의 이미지가 내 안에 투사되고 거기 온유함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선율만으로 그 사람을 가늠하는 것이란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공감할 구석쯤 충분 있을 것이, 온유함이 베토벤보다는 모차르트에게 어울리는 것과 매한가지일 것이다.



2026 파가니니 포스터.jpg

 

 

혜화를 자주 오는 편이지만 여기 극장은 너무도 많아 술집 옆에도, 보잘것없는 골목 어귀에도, 뜬금없는 지하실에도 극장, 극장, 모조리 극장인 탓에 오늘의 극장과 초면이라는 사실이 이상할 일은 아닐 것이다.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는 그 규모와 거기 걸맞을 명성에 비하자면 한없이 낯설었다. 내가 기억하는 혜화의 극장이란 대부분 소극장, 간혹가다 한 번씩 있는 중극장이 전부였던데 비하자면 두 개 층으로 이뤄진 700석 규모의 대극장은 그 품이 넉넉하고 당당하다. 예술의전당처럼 3층 객석이나 좌·우측 날개석마저 배치하진 않지만 층고가 충분히 높은 만큼, 저기 높다란 천장을 부딪치고 머리 위로부터 선율이 하늘하늘 베일처럼 내려 씌이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그 어리숙한 기대는 내가 뮤지컬 장르에 문외한이었다는 사실을 곧 가감 없이 드러내 주었다. 이건 파가니니 연주회가 아니라 뮤지컬이란 사실을 잠깐 간과했음이다.


뮤지컬에 대한 장르 이해가 부족해 일반론을 전개하기란 어림도 없겠고 이번 관극 경험만을 빌어 논하자면, 사운드에 빈 공간이 거의 없었다. 배우들의 연기를 위해 마련된 짧은 독백부를 제하고는 전부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음악의 특성이 어김없이 율동적이다. 이따금 있는 주인공의 내면 서술부에서 소품처럼 활용되는 넘버를 제하고는, 전반적으로 이 장르는 역동적이고 생동감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이것도 뮤지컬의 테마에 따라 다를는지 어떨는지 다 모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운드에 빈 공간이 없는 것은 여전히 장르 보편의 특징인 것으로 보이는데, 나아가 이 작품에선 하나 걸러 하나씩의 넘버마다 클라이맥스 넘버가 섞여 있었던 점이 이목을 끌었다. 1막 중반부부터 배우들은 성대를 긁는 등 가창 실력을 남김없이 뽐내며 소리 높여 노래했고 이에 1막에서는 곧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러나 2막에 서사가 고조되며 더욱 커다란 감정 표현이 요구됨에 따라 사운드는 계속해서 격앙되는 탓에, 이내 귀가 피로했다. 막바지에는 귀를 막아도 피부 위로 음파가 요동을 쳤다. 다르게 말하면 사운드에 빈 공간이 없다는 뜻. 이 장르에 충분히 익숙해진 관객에게는 카타르시스의 향연으로 다가갈지도 모르겠다, 그걸 끝없이 내리꽂는 롤러코스터에 빗대자면 나는 상승과 하강을 오가며 스윙하는 바이킹에 익숙한 관객이다.

 

 

131.jpg

Richard James Lane, Nicolo Paganini, 1831.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NPG D5451.

Image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Mark 1.0.



뮤지컬 파가니니는 창작극으로, 그의 생애 속 극적인 소재를 빌려 만든 허구의 이야기이다. 예컨대 극의 주요 갈등 소재인 ‘카지노 데 파가니니’가 가장 대표적일 것인데, 본 극에서는 파가니니가 이 카지노에 대해 순수한 반감을 품은 것처럼 묘사하는 반면, 실제론 그가 몸소 카지노에 적극적으로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박을 좋아했던 그로서는, 자기 이름을 단 카지노를 향해 연극의 캐릭터가 행한 것처럼 노골적인 반감을 표하진 않았으리라. 이것이 이미 시사하고 있듯 성격에서도 많은 부분 차이점이 돋보이는데, 미친 듯한 난봉꾼은 아닐지언정 몇몇 스캔들을 달고 살았고 더불어 매독마저 앓고 있던 파가니니의 생애와 극이 형성한 순결한 캐릭터는 다분히 대조적이다.


가녀린 소년미가 돋보이는 배역은, 일찍이 상상한 파가니니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이미지다. 그를 상징하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재능을 얻은 비르투오소’라는 수식언과 배역의 이미지 및 캐릭터는 상충한다. 하지만 그것이 창작극의 관전 포인트가 되어주기도 할 것이다. 모든 작품이 현실의 모사여야 한다면, 서사의 자율성과 스케일은 그만큼 축소되는 까닭이다.


본 작품이 영감을 얻은 부분은 그의 생애 중 사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오래 붙어 다니는 수식언이 가리키듯, 당대 교회들은 파가니니를 악마의 하수인으로 간주해 매장을 금했고 그의 아들이 오랫동안 탄원하였다고 전해진다. 소재 자체가 극성을 내포하고 있으니 서사화는 자연하고, 나아가 캐릭터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사를 재창조하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실제의 그는 자신의 재능을 뽐내는 것을 넘어, 일종의 아이돌 신드롬을 끌어낸 영리한 쇼맨이었고, 그를 통해 막대한 부를 그러모은 만큼 쇼 비즈니스에 대한 눈부신 감각을 보였다. 당대에 바이올린 하나를 들고 월드투어를 다닐 정도였으니 얼마나 대단한 수완가였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반면 극이 창조한 파가니니는 여리고 순수하며, 금전에 대해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직 기교와 음악의 완성에 편집적으로 집착하는 캐릭터의 성격은, 실제 인물의 입체적 성격 중 고결한 부분에 집중하여 극대화했다고 여겨진다.

 

 

뮤지컬 파가니니 공연사진 (2).jpg

 

 

내게 뮤지컬은 일종의 환상 동화처럼 다가온다. 음악으로 말하는 장르, 대사와 서사 일체가 음악으로 이루어지니만큼 이 장르에서만 형상할 수 있고, 그렇기에 기대할 수 있게 된 어떤 무드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거기 현실의 핍진성 같은 딱딱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장르 팬들에게는 만부당한 처사임을 헤아린다. 그러나 여전히 핍진성에 천착하는 나로서는, 양식미나 카타르시스보다 인물의 동기·행동의 인과·세계의 개연성이 촘촘하게 맞물리는 리얼리즘 연극, 특히 심리적 사실주의극에 더 가까운 편이다. 이쯤 리뷰를 맺으며 서론의 소재를 재인용하자면, 그런 내 눈에 비친 뮤지컬의 세계는 따뜻한 여름 같다고 하겠다.


그건 실재하는 여름의 이미지로부터 숨이 턱 막히는 무더위와 줄줄 흐르는 땀과 범벅이 된 짜증을 전부 미뤄두고, 오직 여름의 푸르름만을 꿈꾸고 고대하는 모습에 닮았다. 한 겨울에 생각하는 여름 같은 것, 추운 현실의 칼바람 아래에서 여름을 바라는 마음 같은 것이랄까. 그때 피부에 와닿는 추위 위로 떠오르는 여름의 이미지는, 현실의 추위와 차라리 소망하는 무더위가 뒤섞인 가운데, 따뜻한 여름처럼 와닿을 것이다.


 

뮤지컬 파가니니 공연사진 (1).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