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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종종 영웅의 이름으로 기억되지만 한 시대를 움직인 것은 이름보다 그들이 끝까지 지키려 했던 가치였다.

 

누군가는 시대를 바꾸기 위해 싸웠고, 누군가는 그 싸움을 기록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끝내 침묵을 선택했다. 뮤지컬 <박열>은 그 서로 다른 선택들이 교차하는 순간을 무대 위에 펼쳐낸다. 관동대지진 이후의 역사적 비극을 출발점으로 삼지만 작품이 끝내 응시하는 것은 사건 자체보다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신념과 선택이다.

 

 

 

역사를 움직인 사람들


 

작품은 박열을 중심에 두지만 그의 영웅성을 강조하기보다 신념 앞에서 끝없이 선택해야 했던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 가네코 후미코와 류지라는 대비되는 인물을 배치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가네코 후미코의 존재감이다. 작품은 그를 박열을 보조하는 인물이 아닌 독립적인 사상과 의지를 지닌 인물로 그려낸다. 일본인이라는 태생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후미코의 모습은 박열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유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은 <박열>이지만, 공연이 끝난 뒤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인물은 후미코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가 그의 서거 100주년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번 시즌이 갖는 의미 역시 더욱 깊게 다가온다.

 

창작 인물인 류지 역시 작품을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다. 실존 인물 사이에 허구의 인물을 더한 선택은 극적 긴장감을 위한 장치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류지는 권력과 성공을 좇는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며 박열과 후미코의 신념을 더욱 선명하게 비춘다.


만약 박열과 후미코만 등장했다면 작품은 독립운동가의 삶을 따라가는 전기극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류지라는 인물이 더해지면서 관객은 세 사람의 선택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고 정의와 야망,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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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지켜낸 삶의 방식


 

그 가운데 가장 오래 남았던 장면은 재판정에서 후미코가 자신의 신념을 직접 밝히는 순간이었다.


권력은 재판을 통해 두 사람을 침묵시키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공간은 박열과 후미코가 자신의 사상을 가장 분명하게 말하는 장소가 된다. 결국 법정은 권력이 진실을 규정하는 공간에서 오히려 권력의 모순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으로 전환된다.

 

후미코가 선택한 것은 박열이라는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기 이전에 국적과 제도보다 인간의 자유를 우선하는 삶의 태도였기 때문이다. 박열 역시 재판을 국가가 자신을 심판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무대로 바꿔 놓는다.


이러한 연출 덕분에 <박열>은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신념이란 거창한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끝까지 증명해야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박열과 후미코, 그리고 류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마주하고 그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 역시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다. 그래서 공연이 끝난 뒤에도 마음에 남는 것은 역사적 사건의 비극성보다 자신의 신념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단단한 태도였다.

 

특히 후미코를 바라보는 작품의 시선은 오래 곱씹게 된다. 그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삶의 방향을 결정한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박열 역시 국가가 마련한 재판을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드러내는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결국 무대 위에서 가장 강렬했던 것은 거창한 혁명의 장면이 아니라 누구의 기준에도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겠다는 인물들의 조용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의지였다.

 

어쩌면 <박열>이 말하는 자유는 세상을 뒤집는 거대한 혁명보다도 끝까지 스스로의 선택을 부정하지 않는 용기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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