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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샛노랗고 뿌연 도시와 몇 가닥의 선의

도시 위에 도시를 겹쳐 보는 일

by 김그린 에디터
2026.06.1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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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에 적힌 날짜는 틀림없는 오월이었지만, 스페인의 남부는 우리네 날씨로 따지자면 이미 여름의 복판을 달리고 있는 참이었다. 해역을 건너면 모로코를 마주하고 있는 바닷가를 낀 도시 말라가의 공항은 Costa del Sol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태양의 해안가라는 뜻이겠거니, 퍽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제 이름에 걸맞게도 도시는 눈길이 닿는 곳마다 노란빛을 띠었다. 채도와 오래됨의 정도가 저마다 다른 노란색 벽돌과 타일과 외벽들이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노란빛 도시 한복판에서 이방인은 오직 나뿐이었다. 이역만리 아름다운 타국의 도시 한가운데에서 홀로 ‘이방인’이 되는 느낌이란, 오래도록 잊고 있기는 했으나 내가 분명히 한때 경험하여 알고 있던 감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다만 걷는 족족 미묘한 시선이 따라붙을 뿐이었다. 때론 관심을 받는다는 일 자체가 그가 국외자임을 사무치게 일깨워 주기도 하는 법이었다. 배우 산드라 오가 봉준호 감독을 향해 전했던 코멘트가 시시때때로 떠올랐다. 여행을 하며 고국이 그립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란 맹세코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날은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거리를 걸어다니며 매 분 매 초마다 했던 긴장이 무색하게도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은 친절하고 유쾌했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내가 길거리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그 앞을 지나치던 걸음을 황급히 멈추어 기다려 준 후 인사를 건네곤 사라졌다. 빨래방을 겸하는 짐 보관소에서 내게 동전이 있는지 물었던 동성 커플은 근처 상가에서 동전을 바꾸어 오곤 환호성을 지르며 돌아와 살갑게 아는 체를 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책방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는 여유롭고 인자했다. 묘하게 차별적인 항공사 직원을 맞닥뜨린 후 피로감에 가득 차 말라가를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에는, 이륙하던 찰나 저만치에 일렬로 서서 비행기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들의 윤곽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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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를 떠나 리스본을 거쳐 포르투로 향했다. 포르투는 모두가 칭송해 마지않는 도시였고 실제로 발을 막 디뎠을 때의 첫인상이 좋았다. 그래서 더없이 불안했다.

 

기대를 하면 어김없이 어그러지고 마는 나의 오래 묵은 징크스를 입증이라도 하듯, 포르투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캣콜링의 경계에 있는 언사를 던지는 사람을 맞닥뜨렸다. 형편없는 중국어를 조롱 조로 내뱉으며 지나치는 사람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불쾌한 말을 내뱉는 사람의 존재는 놀랍지도 않을 정도였다. 예전 같았더라면 대거리라도 했겠지만 이제는 다만 피곤할 뿐이었다.

 

온종일 묘하게 날이 선 상태로 도시를 돌아다녔다. 경계를 한다 해서 대비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선의는 악의를 이기니 몇 가닥의 크지 않은 선의일지라도 그것들을 곱씹어 이겨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조금은 애를 썼다. 이를테면 빵을 하나 달라고 하자 하나를 더 얹어 주며 ‘프로모션 기간이야, 좋은 하루 보내!’ 라고 말했던 빵집 주인 아주머니.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며 그간 갔던 도시와 앞으로 갈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한국인 여성분 같은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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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 도시는 아름다웠다. 도시의 곳곳에서 나는 그간 스쳐 지나간 다른 도시의 잔상을 보았다. 광장 인근은 어딘지 모르게 빅토리아를 떠올리게 했고, 해가 지면 어째서인지 오타루의 밤이 겹쳐 보였다. 저만치에는 그 언젠가 몬트리올에서 보았던 것도 같은 종탑이 서 있었고, 갈매기가 그 주위를 날아다녔고, 숙소의 맞은편으로 내다보이는 포르투 양식의 타일 외벽 건물은 그랜빌 아일랜드 인근의 아파트를 연상케 했다.

 

살짝 이지러져 빛나는 달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내게 남은 경이가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이제 나는 어디를 가든 이전에 보았던 곳을 겹쳐 보고 어떤 곳을 가든 이전에 갔던 곳의 답습처럼 느낄 것이라는 생각을. 또 모르던 바는 아니었지만 - 시뮬라크르를 현실은 결코 따라오지 못하며 머릿속에 있는 관념은 이 세상에 절대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의 재확인을.


또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행은 떠나왔어야만 하는 여행이었다고도 생각했다. 마냥 안온하고 즐겁지만은 않았으며 도리어 조금은 피로하고 지치는 여행이었다 할지라도. 이 순간의 내가 이 여행길에 올라 이런 감상을 되가져가는 것 또한 어쩌면 일종의 안배일지 모른다고. 언젠가 또 다른 새로운 도시에서 나는 태양의 해안가를, 샛노랗고 뿌연 도시를, 갈매기와 바다 내음이 나는 아기자기한 도시를 겹쳐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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