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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우리가 남기고 가는 것들에 대하여 - 연극 '아이들' [공연]

세상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원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

by 장수정 에디터
2026.06.02 16:46

 

 

재난 앞에서 인간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코로나19가 일상을 멈춰 세웠을 때, 누군가는 마스크를 사재기했고 누군가는 확진자의 동선을 들여다보며 수군거렸다. 보이지 않는 위협이 세계를 뒤덮었을 때, 우리는 먼저 각자의 두려움을 챙겼다. 루시 커크우드의 《아이들》은 그 두려움의 다른 이름,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방사능이라는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없는 재난 속에서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거나, 외면하거나, 혹은 선택한다.

 

 

260521 극단 돌파구 아이들 리허설 ⓒ김보연 (077).jpg

극단 돌파구 제공 ©김신중, 김보연


 

원전 사고 이후, 출입 금지 구역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해안의 낡은 오두막에 은퇴한 핵물리학자 부부 헤이즐과 로빈의 집에 오랜 친구이자 전직 동료인 로즈가 느닷없이 찾아온다. 세 사람은 60대 중반이다. 젊은 시절 함께 핵발전소에서 근무했고, 그 발전소는 이제 재난의 진원지가 되었다.


극에는 세 가지 테마의 ‘아이들'이 있다. 피폭되어 죽어가는 소들, 지금도 발전소 안에서 방사능을 버텨내고 있는 20~30대 직원들, 그리고 헤이즐과 로빈의 자녀들. 이 세 층위의 '아이들'은 서로 겹치며 이 극의 핵심 질문을 구성한다. 윗세대는 아랫세대에게 무엇을 떠넘겼는가, 그리고 그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바뀌는 것도 없다. 그러나 로빈은 매일 위험 구역에 들어가 죽은 소들을 직접 묻는다. 헤이즐은 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도 그 구역에는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는다. 로즈가 발전소로 돌아가자고 말할 때도 헤이즐은 비슷한 태도를 취한다. 은퇴한 내가 가서 무엇이 바뀌겠느냐고, 겨우 스무 명이 거길 가서 무엇이 바뀌겠느냐고. 그 말이 틀리지는 않다. 스무 명의 노년 물리학자가 발전소에 들어간다고 해서 사태가 수습될 리 없다. 그들 모두 피폭되어 병에 걸리는 허무한 결말을 맞을 수도 있다.

 

로즈도 그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말한다. 그 안에서 일하는 아이들 하나하나의 얼굴이 보인다고 말이다.

 

 

[돌파구] 아이들(26-0521)_ⓒShin-joong Kim_039.jpg

극단 돌파구 제공 ©김신중, 김보연


 

로즈가 불쑥 찾아왔을 때, 헤이즐은 차를 내오고 안부를 건네며 최대한 일상적으로 반응하려 한다. 그러나 그 일상성의 표면 아래에는 무언가가 들끓는다. 너무 분주하고, 너무 밝고, 어딘가 균열이 있는 친절함. 멀쩡한 듯 보이다가도 폭발하는 헤이즐은 히스테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재난 앞에서 일상을 붙잡으려는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고 동시에 오랫동안 억눌러온 것들의 압력이기도 하다.


뒤에서야 드러나지만 헤이즐은 로즈와 로빈의 불륜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다시 헤이즐을 떠올리면 그의 친절이 새롭게 보인다. 그것은 헤이즐이 살아가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핵발전소 안에서도 선크림을 바르고, 하루의 모든 일과를 적어두는 헤이즐은 둘의 관계를 모르는 척했고, 피했다. 이런 그가 로빈이 소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기는 걸 정말 몰랐을까. 이번에도 그저 모른 척을 한 건 아닐까.

 

 

260521 극단 돌파구 아이들 리허설 ⓒ김보연 (078).jpg

극단 돌파구 제공 ©김신중, 김보연



극의 후반부, 로즈의 대사는 체념에 가까운 진술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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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돌파구 제공 ©김신중, 김보연



"세상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원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


그녀는 손익을 계산하지 않는 영웅이 아니다. 손익을 다 알면서도 그래도 가겠다는 사람이다. 그리고, 루시 커크우드는 이 세 사람이 옳고 그르다고 판정하지 않는다.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한 가지 질문이 따라붙는다. 당신이라면 어느 쪽이겠냐고 말이다. 재난을 외면하며 일상을 지키는 헤이즐인가, 무의미할지도 모르지만 소들을 묻으러 가는 로빈인가, 아니면 다 알면서도 다시 발전소로 향하는 로즈인가.

 

아마 로즈가 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선택이 실제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수도 있다. 발전소로 돌아간 스무 명이 모두 피폭되어 죽는다면, 그것은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그저 허무한 소멸일 수 있다. 로즈도 그 가능성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간다. 여기서 이 극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효과'가 아니다.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행동하지 않을 이유가 되는가, 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흔히 책임을 '내가 일으킨 일을 수습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로즈가 감각하는 책임은 다른 종류다. 그것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연루의 감각이다. 그 발전소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데 기여했던 사람으로서, 지금 그 안에서 버티고 있는 이들과 완전히 무관할 수 없다는 감각. 바꿀 수 없어도 외면할 수 없다는 감각. 로즈의 선택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 연루를 끝까지 살아내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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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초연 때 극단 돌파구는 30대 배우들에게 노년의 인물을 맡겼다. 미래 세대가 현재 세대의 실패를 연기한다는 구도였다. 2025년 재연에서는 원작의 나이에 맞는 배우들이 무대에 섰다. 책임을 지고 가야 할 세대가 직접 그 무게를 짊어졌다. 2026년의 새로운 배우들은 이 연작의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 어쩌면 그 질문 자체가 이 작품이 해마다 다시 무대에 오르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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