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붙이라는 말은 끈적인다. '피는 붉고 질기고 진하다'는 말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서로에게 끈적이고 있을까. 가장 멀고도 가장 가까운 사이로, 결국엔 누군가와 함께 끈적이고 싶어 한다는 것. 그렇게 가족을 만들고 다시 함께 끈적이는 길로 걸어가는 무한한 굴레. 끈적이는 데에도 다양한 속성이 있다. 손 구석구석에 꿀을 잔뜩 묻히고 우는 옆 테이블의 아기는, 엄마 아빠가 완전히 닦아줄 때까지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끈적이는 감각이 불편해 견딜 수 없는 것이리라.
반면 초등학교 수업 시간에 딱풀로 기다란 실을 만들어 검지와 엄지 사이로 늘어뜨리며놀던 내 짝꿍은, 그 끈적이는 느낌을 즐길 줄 아는 아이였다. 그 시절의 나는 짝꿍과 하교하며 설탕가루가 잔뜩 묻은 젤리를 먹고 난 뒤, 끈적이는 손가락을 입으로 빨면 잠시 괜찮아진 것 같다가도, 결국 집에 돌아가 손을 뽀득뽀득 씻어내야만 완전히 편안해지는 어린이였다. 바다에서 물놀이를 끝내고 소금기 가득한 몸으로 나왔을 때, 곧장 비누로 몸을 씻어내야만 하는 어른이 되는 것과, 수건 하나만 두른 채 짭조름한 몸으로 자리에 앉아 불을 쬐는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항상 후자이기를 바랐다. 딱풀로 장난을 치듯, 짠 물에서 나와 몸 위에 하얀 결정이 올라오면 그것을 '소금'이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듯, 삶의 끈적임을 있는 그대로 껴안을 줄 아는 어른이기를 바랐다.
특정 영화의 내용과 그날의 대화가 이상하리만치 겹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엔 영화와 대화가 서로 끈적거리며 엉겨 붙고, 그 사이에 나라는 존재가 항상 끈적하게 끼어있다는 사실이 문득 선명해진다. 멀쩡히 벽에 붙어있던 영화 포스터가 어느 날 밤 갑자기 떨어지는 바람에 잠에서 깨고,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아 밤새 그 영화를 곱씹게 되는 것과 같은 효과다.
그럴 때마다 뚝 떨어지게 내버려 두지 않는 영화가 밉고, 이어지는 대화가 밉고, 끝내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버린 포스터가 미워진다. 좀 더 찐득하게, 오랫동안 붙어있었으면 계속 몰랐을 문제였을 텐데. 익숙해진 끈적임이 그 쓰임을 다하고 바닥을 드러내면, 밀려오는 불편함을 삼킬 수 없다. 처음 붙였을 때와는 절대로 똑같아질 수 없는 얼룩진 벽, 결국 지워지지 않고 남아버린 끈적임, 그리고 이미 떨어져 나간 포스터. 이 풍경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공동체가 가진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개인인 '에스더'는 자신의 삶에 평생 갈 상처를 입고 자유를 빼앗긴다. 규율에 따라 남성을 유혹한다는 이유로 밀려버린 머리카락, 배울 시기를 놓쳐 전공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피아노 실력. 그러나 그녀에게 체제를 강요했던 공동체 속 할머니와 몰래 불렀던 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다시 새로운 세상과 끈적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가해와 피해가 뒤엉키는 역사를 목격하는 지금, 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공동체의 상처, 공동체가 가족에게 준 상처, 그리고 가족이 나에게 준 상처. 상처와 사랑이 공존하는 끈적임. 에스더가 도망쳐 나온 하시디즘 공동체의 결혼은 '잃어버린 유대인 인구를 복원한다'는 명목 아래, 여성의 외부 활동을 차단한 채 매년 아이를 낳도록 강요하는 형태다. 이런 결혼을 행복이라 가르치고, 에스더가 결혼하는 것이 자신의 소원이라 말하며 볼에 입맞추던 할머니는 정말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걸까. 에스더가 아는 모든 요리를 가르쳐 준 이가 할머니임에도, 남자들의 눈을 피해 함께 노래를 불러주었던 이가 할머니임에도, 그들이 나눈 정동이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에스더가 할머니를 포함한 공동체로부터 도망친 곳, '베를린'. 그녀가 자유를 찾는 첫걸음의 기반 역시 결국 도망쳐온 할머니로부터 기원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19년간 자유를 빼앗긴 채 성장한 에스더는 평생 윌리엄스버그 하시디즘 공동체라는 정체성 안에서 끈적일 것이고, 유대인으로서 탄압받아온 역사는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지층 안에서 끈적인다.익숙한 끈적임은 숨이 막히고, 낯선 미끈함은 무섭다. 그 무력한 가운데, 베를린의 역사적 지층과 그 위를 부유하는 에스더의 몸을 가라앉히기도, 띄우기도 하는 호수는 조용히 그 자리에 흐를 뿐이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걸어 다니다가, 샤워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내 몸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며칠 전에 생긴 정체 모를 멍들이 이제는 넓게 퍼져 다 같이 뒤엉킨 채 푸르딩딩하다. 어렸을 때 놀이터에서 생긴 멍들은 열심히 놀았다는 훈장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이유를 모르는 멍을 마주해도—이게 놀다 생겼는지, 맞아서 생겼는지, 넘어져서 생겼는지 몰라도—여전히 훈장처럼 여겨진다. 웬만한 자극에는 멍이 들지 않는 단단한 몸이 되는 것과, 이미 생겨버린 멍에 무뎌지는 것 중 무엇이 더 좋은 것인지는 평생 모를 것 같다. 푸르딩딩한 멍. 나의 피를 내부에 가득 머금은 채 묵묵히 회복하고 있는 상태. 눈에 보이지만 직접 만질 수 없는 상처이자, 부유하면서도 안에서는 끈적이고 있는 나만의 작은 호수. 언젠가 친구가 내게 물었다. 남들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일을, 왜 자신은 이렇게 미리 다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러게 말이다.
왜 우리는 이런 일들을 겪어내야 할까. 당시 내가 어떤 위로를 건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왜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가 다음 세대에게 다른 형태의 상처로 유전되며 끈적이는지, 멍 아래의 숨은 공간에서 왜 우리는 서로를 멍들게 하며 살아가는지 생각할 뿐이다. 그 지독한 인과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멍이 훈장이 되기도 하고, 때론 수치가 되기도 하는 것. 끈적임이 당장 씻어내야 할 불편함이 되는 동시에, 결국 다시 찾아내야 할 연결고리가 되는 것처럼. 호수가 흐르고 흘러 결국 바다로 이어지듯, 내 몸 위에 남은 하얀 소금 결정, 그리고 오늘의 샤워로 씻겨 내려보는 이 지근한 끈적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