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불킥'이라는 말이 있다. 잠들기 직전, 과거에 겪었던 수치스러운 일들이 떠올라 이불에 발길질하는 행위를 뜻한다. 지금까지도 이 단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이들이 이에 공감하고 실제로 행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평소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불킥은 이제 일종의 루틴 같은, 습관의 영역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분노, 외로움, 억울함과 같은 수많은 부정적 감정이 존재하는 가운데, 굴욕은 어째서 '이불킥'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일까? 이는 분명 굴욕이 '사회적 평판'과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웨인 케스텐바움은 굴욕에는 피해자, 가해자, 목격자의 삼각관계가 존재한다고 언급한다(16). 결국 굴욕에는 필연적으로 '굴욕적인 상황'에 대한 전시와 노출이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이보다 더 치명적인 타격이 있을까?
그런데 라틴어에서 인간(humanus)과 굴욕(humiliatio)은 접두사를 공유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인간의 삶은 굴욕과 분리될 수 없다(7). 우리는 끊임없이 굴욕을 목격하고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작가는 할리우드 스캔들이나정·재계 사건부터 본인 혹은 주변인들의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크고 작은 일화들을 나열하며 굴욕에 대해 낱낱이 파고든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굴욕에는 어떤 조건이 따르는지, 어떤 상황까지 굴욕에 해당하는지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굴욕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탐구하는 것은 물론 타인에게 고의로 굴욕을 가하지 않을 것을 제안하며 굴욕의 승화와 최소화를 지향한다.
책을 읽는 내내 타인의 이야기들임에도 멈칫하고 책을 덮는 일이 종종 있었다. 다른 사람의 수치스러운 감정이 나에게 전염되는 공감성 수치 때문이었다. 지금은 목격자의 위치에 서 있지만,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타인의 상황에 자신을 대입해 보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더 나아가 실제로는 굴욕이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그 사람이 지닌 취약성이나 소수자성 때문에 그런 괴로움이 닥칠 가능성을 묘사하기 위해서도 굴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밝힌다. 이에 대한 예시로 작가는 식료품점에서 장애 여성을 보았을 때,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었음에도 그가 겪을지도 모르는 굴욕의 가능성을 느꼈다고 했다(100). 이는 지나치게 타인을 동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나 역시 과하게 시혜적인 태도로 누군가를 바라보지 않았었나 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도 쉽게 인간을 바닥으로 내려치는 굴욕은, 아이러니하게도 해소와 이완을 제공하기도 한다. 굴욕을 겪거나 숨기지 않음으로써 겪게 되는 이 해소를 '속 뚫림 작용'이라고 한다(15). 유명 연예인들이 토크쇼에서 자발적으로 수치스러운 경험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자신의 흑역사를 먼저 언급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내가 숨기고 싶어 했던 무언가를 그저 노출해 버림으로써 숨길 게 없는 자유로운 상태로 전환되는 것이다.
작가는 모두가 숨기고 싶어 하는 굴욕이라는 주제를 완전히 들춰버림으로써 판도라의 상자를 활짝 열었다. 이에 따라 책 속에 언급된 굴욕의 사례를 읽는 것만으로도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전에 굴욕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굴욕의 피해자가 느낄 감정이 확연히 와닿았기 때문이다. 또, 그 감정을 알고 있음에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나를 가해자의 상태로 내몰았다. 결국, 굴욕의 목격자와 가해자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았더라도, 시선만으로 한 인간을 추락시켜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다짐한다. 굴욕의 피해자를 방관하지 말 것. 누군가를 고의로 굴욕에 처하게 하지 말 것. 이것이 바로 더럽고 추한 것들이 빠져나간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남아 있는 '희망' 한 줌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