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독서 모임에서 책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기 전까지는, 역사 교과서에 몇 줄 적히지도 않은 '제주 4.3'이라 불리는 일이 책 한 권에 담길 만큼 무거운 사건인 줄도 몰랐다.
그래서 궁금했다. 학교는 왜 이 사건을 학생들에게 더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 걸까. 물론 역사를 깊이 알지 못하는 내가 모든 사건의 중대함을 함부로 판단할 순 없지만, 적어도 앞으로 이 사회를 이끌 세대들이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도 무심히 지나갈 뻔한 제주 4.3을, 연극 <돔박아시, 고이래> 덕분에 오래된 기억 속에서 다시 꺼내볼 수 있었다.
피해자 유가족 '한 사람'의 이야기

소재가 소재인 만큼,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연극의 막이 올랐다.
극의 중심 인물인 고이래가 쓰러진 비석에 앉아, 동백아가씨 노래를 읊조린다. 그녀는 어릴 적, '제주 4.3'이라 불리는 제주도민 대규모 학살 사건으로 인해 부모님을 잃고 혼자가 된 인물이다. 작품은 제주 곳곳에서 유해가 발굴될 때마다 자신의 부모이기를 기도하며 평생을 살아온 고이래의 시간을 깊이 파고든다.
그렇게 100분동안 관객들은 고이래의 긴 세월을 따라 걸었다.
제주 4.3 피해자 유가족의 과거와 현재를 이토록 가까이에서 접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래서 '피해자' 혹은 '피해자 유가족'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제주도민 개개인의 삶에 집중한 점이 기억에 남았던 작품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짊어진 슬픔과 고통

고이래 이외에도 제주 4.3 사건과 관련하여 각자의 사연을 품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학살을 주도했던 채진광의 동상을 쓰러뜨린 고이래와는 달리, 그날의 기억에 대한 슬픔과 고통을 가슴 깊이 묻어둔 채 숨죽이며 살아온 이들의 서사에 결국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고이래의 엄마 고운정과 친구였던 부춘옥은 사건 당시, 자신의 자식을 지키기 위해 고운정이 숨어있던 동굴의 위치를 그녀를 쫓던 군인에게 알려주었다. 그 일 이후, 고운정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평생을 죄책감에 살아야 했다.
또 다른 인물 강철구는 당시 이승만 정권의 초토화 작전에 투입된 군인이었고,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도민들이 숨어있던 동굴을 향해 발포했다. 물론 그와 다른 선택을 한 고이래의 아버지인 윤상진이 존재했고,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끝내 반성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를 온전히 감싸줄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만약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과연 강철구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 앞에서, 차마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남겨진 사람들의 침묵

연극 <돔박아시, 고이래>에서 그려낸 제주 4.3 사건 이후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는, 책으로 접했을 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국가권력에 의해 소중한 이를 잃어야 했던 사람, 윤리에 어긋난 명령에 복종해야 했던 사람 등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인물들의 속사정을 대사와 행동으로 섬세하게 표현해낸 점이 인상 깊었다.
채진광의 동상을 쓰러뜨릴 수밖에 없었던 고이래의 속사정을 알면서도, 끝내 그날의 기억을 꺼내지 않으려 했던 인물들의 사연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고이래의 선택을 이해하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침묵을 택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침묵이 온전히 그들의 선택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억울한 죽음과 옥살이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조차 받지 못한 채, 숨 죽이며 살게 만든 국가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느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제주 4.3을 소재로 한 작품이 다양한 시선에서 꾸준히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물론, 앞으로 이 사회를 이끌 다음 세대에게도 사건의 무게가 온전히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