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돔박아시, 고이래>는 프로덕션IDA(아이디에이)의 근현대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주체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제주 4·3 주제 극입니다.
작품 소개
2003년 봄, 제주시 푸른동산
한 동상이 쓰러지고, 주변에 수십 개의 빗창이 꽂힌 모습으로 발견됐다는 뉴스가 전해진다.
범인은 홀로 사는 60대 해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말하지 않고, 노래만 읊조린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재판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고백이 오래 묻혀 있던 침묵을 찢어낸다.
마침내 그녀의 목소리가 재판장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다시 고요해진 재판장, 해녀는 다시 노래한다.
돔박아시, 동백꽃 동생
돔박은 제주어로 동백꽃을 의미하며, 아시는 동생을 의미합니다.
작중 고이래는 동상 훼손에 대한 형사 수사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동백아가씨>만을 읊습니다. 이 노래는 울부짖음도, 호소도 아닌 상태로 흘러갑니다. 고요한 밤바다 같은 그 태도는 되려 언어로 형용될 수 없는 시간과 기억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1948년에 드리웠던 죽음의 시간이 고요히 겹쳐진 <동백아가씨>는 고이래 개인의 정서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고이래의 노래는 한순간도 사라진 적 없는 묵은 영혼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총과 칼이 무고한 시민의 몸과 마음을 꿰뚫을 때, 이들의 두려움과 억울함은 연좌제로 억압되어 제주 바다 깊은 곳에 넘실거렸습니다. 가라앉은 감정들은 오래도록 이름 없이 남아 있었지만, 고이래의 눈과 입을 통해 다시 우리 앞에 떠오릅니다.
결국 고이래의 침묵은 단순히 말을 아끼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전해질 수 없었던 시간들이 한 사람의 몸 안에 남아 있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그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노래를 반복한다. 언어로는 꺼낼 수 없는 것들이 다른 형태를 띠어 비집고 나오는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처절합니다.
재판장에 모인 사람들의 고백이 이어지는 장면 역시 같은 맥락 위에 놓여 있습니다. 고이래의 목소리가 시작점이 되어 각자의 시간 속에 묻혀 있던 기억들이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그동안 침묵으로 남아 있던 것들이 서로를 불러내듯 이어지는 순간, 개인의 이야기는 더 이상 개인의 것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동의 기억으로 확장되어 비로소 지금 이곳에 다시금 존재합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과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시간이 여전히 현재에 머물러 있음을 조용히 증명합니다.
우리가 헤아려야 할 영혼들
무대 위의 비석은 시계추처럼 움직이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매개가 됩니다. 지나간 일로 정리된 사건이라는 베일을 벗겨,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시간으로서의 4·3을 호출합니다. 비석이 흔들릴 때면 고정된 줄 알았던 역사가 다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남깁니다. 고이래가 거스르는 시곗바늘의 무게를 감히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시간의 교차들은 ‘만약’의 장면들을 통해 더욱 선명해집니다. 고이래의 부모가 죽지 않고 평범한 삶을 이어갔을 가능성, 즉 존재했어야 할 일상이 무대 위에 스쳐 지나갈 때, 관객은 비로소 상실의 크기를 체감합니다.
비극은 단지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있었던 삶 전체가 사라졌다는 데 있습니다. 현실과 교차되는 이 가상의 장면들은 오히려 실제 역사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그날의 균열을 묘사합니다.
우리는 기억되는 방식 자체에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호국 영웅으로 불렸던 인물의 한편은 무고한 도민을 학살한 가해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뒤집히지 않은 채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기념되었으며, 그의 후손은 권력과 자본을 이어받습니다. 동상이 세워진 자리 위에 또 다른 개발이 이어지는 장면은 폭력이 단절되지 않고 형태만 바꾼 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지우는가에 따라 역사는 전혀 다른 얼굴로 남게 됩니다.
동백꽃이 송이째로 떨어지는 모습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스러져간 사람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약 3만여 명에 이르는 이들의 삶은 충분히 애도 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침묵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반복해서 불러내는 기억들은 뒤늦게라도 제대로 불려야 할 이름들을 꺼내오는 과정입니다.
<돔박아시, 고이래>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계기로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고이래의 노래와 침묵, 그리고 무대 위를 오가는 시간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우리 앞에 도달한 것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응답해야 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