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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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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도도한 생활』 속 ‘나’를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대학 입시를 위해 수능특강을 풀었을 때다. 무엇이 ‘도도’한 생활일까? 그저 지나가는 국어 지문으로 치워두고 암기만 했던 시절에도 내게 남았던 소설의 마지막 부분. 그것은 물에 잠겨가는 반지하방에서 피아노를 치던 ‘나’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만을 기억하던 지금의 나는 또다시 ‘나’의 도도한 생활을 엿보고 물에 잠긴 페달 마냥 눅눅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서울권 대학 컴퓨터학과에 합격한 20대 청년이다. 어릴 적 엄마가 사준 피아노를 지금은 치지 않지만, 현재 언니와 ‘나’의 반지하방에는 여전히 피아노가 자리하고 있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비가 오면 피아노와 함께 비를 맞는다. 작품을 읽고 나의 마음에 곰팡이가 자리 잡은 이유는 빗물이 들이닥치는 반지하방이 내가 바라본 삶의 민낯과 너무 닮아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나’의 피아노를 지킬 수 있을까?

 



‘나’는 피아노를 -



 

...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방에서, 이 거리에서, 이 시장과 저 공장에서, 이 골목과 저 복도에서, 그늘에서, 창 안에서, 세상 사람들은 가끔 아무도 모르게 도-도-하고 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사람들 저마다 자기도 모르게 까닭 없이 낼 수 있는 음 하나 정도는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하고.

 

 

낮은음일수록 오래간다고 했던가. 이것이 ‘나’에게 적용될지는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세상이 곧 피아노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계이름으로 인식하며,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과 피아노를 동일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의 바람이지,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를 피했던가. 엄마가 운영하는 만둣집에서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았던 것은, 이상이 현실이 될 수 없음을 점점 자라나는 ‘나’의 몸과 함께 깨달아서일 것이다.


‘나’는 정말 피아노를 피했던 것일까. ‘나’는 세상을 때리고, 치고, 누르고, 두드리면 소리가 나는 것으로 인식한다. 생계를 위한 워드 작업 아르바이트를 위해 건반 대신 자판을 치면서, ‘나’는 정말로 피아노의 ‘도(Do)’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나’는 피아노를 치고,


 

 

나는 신나게 손가락을 놀리다 번번이 디귿 키 앞에서 멈춰 섰다. 나는 도로 위로 뛰어든 사슴이라도 본 양 디귿만 보면 긴장했고, 그제야 세상에 디귿이 들어가는 글자가 얼마나 많은지 깨달으며 한탄해야 했다.

 

 

자판을 치던 ‘나’는 그토록 곱씹었던 ‘도(Do)’에 디귿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비가 오기만 하면 ‘나’는 긴장해야 한다. 마치 디귿 자 자판을 치기 전에 긴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가 오면 당연히 비는 흘러 흘러 더 낮은 곳으로 향한다. 인간에게 낮은 곳이란 신분일 수도, 등급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 낮은 곳이란 곧 ‘반지하방’이다. 누군가의 천장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흘러오는 반지하방. 비가 온다면 그 빗물은 무조건 ‘나’에게로 온다. 이곳에 머무는 한,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빗물이 가득 들어찰 때, ‘나’는 언니의 영어 교재, 컴퓨터 전선, 현관 앞 신발이 물에 젖지 않게 치워둔다. 피아노를 치우지 못한 이유는 피아노의 무게 때문이다. 피아노는 무엇을 담고 있길래 이것을 옮기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고, 눈치를 보고, 변명을 하며, 쓰러져야 하는 것일까. 너무 무거워서 빗물에 젖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피아노의 ‘무게’는 ‘나’에게 무겁다.

 



‘나’는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



 

엄마는 차압 딱지가 붙기 전, 값나가는 물건을 팔아버리고자 했다... 그러나 10분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우리 집서 값나가는 물건이 피아노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는 고민하다 피아노는 일단 갖고 있자고 했다.

 


‘도도한 생활’이라는 제목의 상징은 너무 당연스럽게도 ‘피아노’로 다가온다. 더 명확히 하자면, 피아노는 ‘나’의 엄마의 자존심이겠지만, 사람들의 감정을 계이름을 해석하기 시작한 이상 피아노는 ‘나’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나’에게도 자존심일까? 지금까지 피아노를 치지 않은 이유는, 정말 흥미가 가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가족에게, 그리고 ‘나’에게 저 피아노가 어떤 의미인 줄 아니까 기피했던 것일 수도 있으리라.


낮은 곳이자, 비가 오면 빗물이 고이고, 곰팡이가 슬고, 어릴 적부터 어쩌면 누군가의 자존심이었을 피아노가 있는 ‘반지하방’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일시적 주거지가 아닌, ‘나’의 마음이다. 다음에는 워드 작업이 아닌, 꼭 ‘외부’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결심한 ‘나’의 마음엔, 지금까지 떠나지 못했던, 마음보다 더 깊숙한 ‘내부’가 있다. 그것은 한동안 건드리지 못했던 피아노일 수도, 달력을 찢어 덧대놓아도 늘어날 곰팡이일 수도, 이미 고여버려 바가지로도 퍼낼 수 없는 빗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가 ‘나’와 언니를 키워낸 만두가 있을 수도 있겠지. 아빠가 보증을 서느라 생겨버린 빚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반지하는 돈이 있어도 떠날 수가 없다. 떠나지 못하는 반지하 속 피아노의 소리가 계속 날지는, 그 피아노를 쳐 본, 연주해 본 ‘나’만이 알겠지.

 



나는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



『도도한 생활』의 상징은 너무 당연스럽게도 ‘피아노’라고 다가온다. 우리가 아는 ‘도도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에 고급적 이미지인 피아노가 너무 잘 어울려서 그런 것일까. 근데 그것을 ‘나’의 피아노를 쳐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의 엄마가 그 형편 속에서 지켜내고자 했던 피아노가 마치 ‘기념비’ 같다고 했던 ‘나’의 감상을 우리는 덜컥 믿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지만 정작 우리는 ‘나’에게 ‘피아노’가 어떤 존재인지 듣지 못했다. 피아노를 친 지 오래되었고, 진심으로 미련도 없으며, 나를 생각해서 피아노를 팔지 않으려는 것이라면 정말로 상관없다는 ‘나’의 말. 그런 ‘나’는 빗물 속 반지하방에서 마지막일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나’를 그토록 긴장시켰던 디귿 자가 들어간 ‘도(Do)’를 울리며, ‘나’는 연주를 시작했다.


‘도’만 알면 다른 음들은 치기 쉽다고 했던가. ‘나’에게 이 순간은 ‘도(Do)’다. 지금껏 이 반지하방에서 선명히 울리지 못했던 ‘도’. ‘도도(滔滔)’한 생활이 아닌 도도한 생활.


나는 어쩌면 이 삶을 꿈꿔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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