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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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꼭 같이, 혹은 여럿이 모두 꼭 같이 하나와 같이. '한결같다'라는 말의 뜻이다. 처음과 끝이 똑 닮아있다는 말을 들으니, 머릿속에서 원이 그려진다. 시작점이 없는 원처럼 늘 같은 정도로, 같은 궤도를 따른다는 것은 곧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고 어디서든 끝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문학을 다루는 사람은 단어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한결같음이란 쉽게 뱉을 수 있을 정도의 무게가 아니다. 처음과 끝이 같음을 인정하기 위해 해진이 걸어야 했던 그 무거운 길을 따라가 본다.

 

 

 

처음은 팬레터 


 

해진은 어느 날부터 히카루라는 이름의 팬과 편지를 주고받는다.

 

 

선생이시여, 슬픔을 안고 계시나이까?

그렇다면 그 슬픔을 나누어 주소서.

그리고 거기 따르는 길을 지시하여 주소서.

 


자신과 슬픔을 공유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설렘으로 가득 찬다. 결핍을 채워줄 만한 사람을 드디어 만났다는 기쁨에 손꼽아 답장을 기다린다. 문인 단체 '칠인회'에 들어가 소설을 쓰면서도 히카루의 답장이 오면 발 벗고 나선다.


히카루와 대화를 나눌수록 유대감은 점점 깊어지고, 이윽고 팬레터는 러브레터로 변화한다. 해진 자신이 앓고 있는 결핵도 잊을 정도로 히카루와 그녀의 작품 세계에 몰입한다.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그녀에게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냐고 묻는 칠인회의 어린 급사에게 답한다. 편지의 주인이 누구라도 자신은 상관없다고. 그럼에도 자신의 뮤즈와는 만날 수 없다. 히카루는 만나자는 자신의 말에 돌연 연락을 끊는다. 해진은 이윽고 혈서까지 쓴다.

 

 

 

이제는 러브레터


 

해진은 히카루가 자신과 같은 결핵을 앓고 있다는 운명 같은 사실에 그녀에게 더 깊이 빠진다. 소설을 공동 집필하기로 하며 해진은 작품 활동에 집중한다.


마취와도 같은 사랑에 빠졌다고는 하지만 그의 병은 낫지 않는다. 악화하는 폐병과 고통에 병원을 찾아가도 의사는 이미 너무 많이 진행되었다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해진은 초조해진다. 제 죽음은 이미 확실한 것. 히카루와 함께 쓰는 소설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다. 약을 먹으면 정신이 몽롱해져서 집중할 수가 없으니 약을 참고, 각혈하며 글에 매달린다.


주변에서 아무리 말려도 해진은 들을 생각을 안 한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지만 애써 무시하려고 한다. 이 또한 실패한다. 자신을 열심히 돕던 조수 세훈이 사실 그동안 해진과 편지를 나눈 이는 자신이라고, 히카루는 자신의 필명이라고 한다. 해진은 말한다. 농이 지나치구나, 이만 돌아가렴. 세훈이 제발 자신을 봐달라고 외치지만 해진은 끝까지 세훈을 외면한다. 세훈이 히카루를 죽였다며, 왜 그랬냐며 원망한다. 자신이 기회를 줬는데도.

 

 


 

 

 

마지막은 편지의 주인에게


 

해진은 히카루가 아닌 세훈에게 편지와 꽃, 마지막 원고를 남기고 세상을 뜬다.


 
한결같이 너의 답장을 기다리마.
 

 

해진이 세훈과 히카루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참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배신감에서 시작해서 안타까움, 그리고 고마움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민을 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해진에게, 한결같이 세훈의 편지를 기다리겠다는 말은 그동안 자신이 세훈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말의 또 다른 형태일 테다.


이 극을 관통하는 또 다른 말로는 사랑의 형태에 대해 논하는 대사일 것이다.

 

 
결국 우리들은 사랑의 모든 형태에 탐닉했으며, 사랑이 베풀어 줄 수 있는 모든 희열을 맛보았노라.
 

 

세훈과 해진이 공유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누가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타이밍조차 맞지 않았어도 결국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더욱 슬프기도 하다. 언젠가 받았던 편지에서, 편지의 묘미는 보내는 시간과 도착하는 시간, 그리고 그것을 읽고 다시 답장을 쓰는 시간이 모두 달라 다른 시간을 공유하면서도 같은 세계선을 따른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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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뮤지컬을 봤지만, 팬레터처럼 완성도가 높은 극은 오랜만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덧붙일 말이 없이 순순히 감동에 빠져들 수 있는 작품이었다. 팬레터 자체는 처음 감상하지만, 이전부터 전체 줄거리나 넘버는 다 알고 있어 내용 이해도 어렵지 않았다. 알고 있음에도 보는 내내 전율이 흘렀다. 또 볼 의향도 있는, 역시 10주년을 맞은 창작 뮤지컬의 힘을 느낀 시간이었다.


답장을 기다리는 해진에게 세훈은 영원히 도착하지 못할 답장을 쓸 것이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답장받지 못하더라도 편지를 쓸지, 혹은 도달하지 못할 편지를 쓸지 알 수는 없지만 <팬레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것일 것이다. 아무리 크게 휘청이고 멀리 돌아가더라도 결국은 시작점과 만나게 되는 것이 원이라고. 아무리 구겨지고 이상해도 원은 원이라고. 그게 사랑이 포용하는 모든 형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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