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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25년에도 한국 영화의 침체가 크게 나아지지 않은 가운데, 올해 역시 다수의 기대작이 기다리고 있다. 류승완 감독의 <휴민트>, 나홍진 감독의 <호프> 등등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 이후 8년 만의 신작 <가능한 사랑>이 무척 기다려진다. 이 글에서는 감독의 가장 최근 작품이자 최고작으로도 평가받는 <버닝>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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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의 골자를 거의 그대로 따르면서도, 초단편 소설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창조적인 부분들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우선 그녀와 나, 그 남자라는 인물 구도가 동일하다. 그 여자는 모델 일을 하며 팬터마임을 공부한다는 설정, 귤껍질 까기, 주요 대사들, 아프리카에 가서 만난 남자(원작과 달리 애인은 아니다), 그 남자의 특징들, 포크너 단편집이라는 장치, ‘나’의 집에 놀러 온 뒤 그녀가 사라지고 그 남자의 발언에 ‘나’는 헛간을 살피고 다니는 것 등등 대부분의 흐름이 흡사하다.


하지만 그 외에 세세한 설정들이 추가되었고 또 크게 두 가지가 달라졌는데, 첫 번째는 해미가 단순히 옷을 벗고 잠드는 것이 아니라,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춤으로써 더 진취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종수가 헛간(비닐하우스) 정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소설을 쓰게 되며, 나아가 벤을 죽이게 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주제 의식 자체가 재구성되며 <버닝>만의 정체성을 만들어주었다. 덧붙여 일본을 한국 배경으로, 언어를 영상으로 바꾸는 과정에서도 많은 표현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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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이라는 것은 주로 봄, 여름과 결부되는 이미지지만 이 영화에서의 젊음은 겨울, 그것도 아주 메마른 겨울 같다.


루카치 <소설의 이론>에서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신이 부재하는 분열된 세상이고, 소설은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것과 투쟁한다고 말한다. 이 영화는 그런 ‘진짜 소설’을 닮았다. 해미는 그 정점에 다다라있는 인물이다.


해미의 현실적인 상황들이 어떻든 간에 그녀는 늘 싱긋이 웃고, 파편 같은 빛을 볼 줄도 알고, 자신의 힘으로 (원작에서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갔으나) 아프리카에 가서 해방을 맛보고 오기도 한다. 자신을 구경거리로 여길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몸소 춤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 끝에는 황혼 앞에서 맨몸으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춘다.


그러니 해미의 실종은 필연적이고 영화에서 더 이상 그 행방을 알아내야 할 이유가 없다. 이제 초점은 종수에게로 간다.

 

종수는 성큼 나아가는 해미에게 창녀 같은 행동이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해미 없이 남겨진 종수는 점차 변한다. 처음엔 해미를, 그 다음엔 우물(해미의 허물), 비닐하우스(종수 자신)를 찾아 헤매고, 결국은 벤을 쫓아 죽이게 된다. 해미와 벤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때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않던 종수는 이제 소설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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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드러난 세 인물의 관계성이 모두 매력적이다. 우선 해미와 벤이 있다. 살면서 울어본 적이 없다는 벤은 기계적인 세상 자체를 상징하는 듯 보인다. 여유로운 듯하지만 그의 태도에서는 어딘가 숨 막히는 나른함이 묻어나온다.

 

그에 비해 해미는 살아 움직인다. 벤은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데, 즉 이미 무너진 것을 더 무너뜨리는데, 해미는 팬터마임을 한다. 손에 쥐어진 것 없이도, 다 무너진 폐허에서도 그녀는 귤을 먹을 수 있다. 벤과 어울려 대마초를 피우다가도 벌떡 일어나 춤을 출 수 있다.


다음은 해미와 종수다. 둘은 젊고 가난하고 불우하다는 면에서 비슷한 처지다. 똑같은 바닥에서 만난 사이라는 것은 오히려 편안하다. 종수는 해미의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문득 보인 용산의 풍경이 예쁘다고 느꼈을 것만 같다. 메마른 세상에 사는 종수에게 해미는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종수도 해미를 이해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사람이었다. 고양이가 없다는 걸 내가 잊어먹으면 되는 거냐고 물을 때, 몇 안 되는 종수의 순수한 웃음이 보인다. 그는 고양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꼬박꼬박 밥을 준다.


마지막은 벤과 종수다. 종수가 벤을 죽이는 결말 역시 필연적이다. 종수는 점차 해미처럼 의미를 갈구하기 시작한다. 사람을 번호 취급하는 택배 일을 그만두고, 세상의 부품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한다. 엄마를 만나기도 하고, 우물이 뭔지, 비닐하우스는 또 뭔지, 나름의 답을 찾아간다.

 

종수는 비닐하우스, 즉 자기 자신을 간절히 살리고 싶기도, 때로는 직접 태워버리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종수는 벤의 한 마디로 그렇게 흔들릴 수 있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종수는 벤을 찔러 죽이고, 그와 자신의 허물을 활활 태워버리기를 택했다. 추위에 덜덜 떠는 맨몸의 종수가 우습게도 무척이나 강인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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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버닝>은 1983년 발표된 <헛간을 태우다>를 한층 더 발전시킨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메타포에 이야기가 잡아먹힌 듯한 느낌에 약간은 거부감이 들 수 있다. 영화가 매우 시적인 나머지, 충분한 설명 없이 관객의 생각으로 영화의 결여를 메워야 하는 방식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그럼에도 없다는 것을 잊어야 하는 팬터마임처럼,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처럼 이 영화가 좋았다. 이 모든 게 허구라는 것을 잊는 일, 닿을 수 없더라도 손을 뻗는 일은 늘 어딘가 아름답다.

 

나에게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올해도 좋은 문화예술을 많이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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