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지방에서 도쿄로 상경한 여성의 일상과 고충을 담아낸 시이나 링고의 노래 <마루노우치 새디스틱((丸ノ内サディスティック)>에서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도쿄는 사랑하지만 아무것도 없어.’ 대도시는 풍부한 기회를 제공하지만 정작 커다란 장소에 마음 뉠 곳 없어 외로움을 부르짖게 만드는 이중성을 가진다. 불특정 다수가 하루에도 수천 번씩 오가는 이곳에서 이따금씩 우리는 도시에서 찾고자 했던 꿈과 꺼지지 않으리라 확신했던 열망을 가끔 잊어버린다. 그럴 때면 덩치만 클 뿐, 기댈 곳 하나 없는 도시에서 타인과 단절된 채 고립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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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언 고닉의 『짝 없는 여자와 도시』 속 배경은 한국인에게 친숙한 서울이나 시이나 링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도쿄보다 더 광활한 뉴욕이다. “뉴욕은 나의 도시인 만큼이나 그들의 도시이지만 어느 누구도 이 도시를 더 가지진 못한다.” 고닉에게 있어서 뉴욕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자 변화무쌍한 성격으로 종종 생경함을 안겨주는 도시로 인식된다. 이 책에서 고닉은 뉴욕에서 만난 이웃, 친구, 연인들을 소환하며 자신의 사유를 솔직하게 적어내려가고, 자신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맺은 사람들과의 우정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뉴욕 브롱크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고닉은 뉴욕 안에 거주하면서도 뉴욕을 그리워했다고 회고한다. 어린 그녀는 풍요함과 화려함, 다채로움을 지닌 ‘진짜’ 뉴욕을 느껴보기 위해 혼자 지하철을 타거나 무작정 친구와 걷고 또 걸으며 뉴욕 안을 누빈다. 그곳에서 고닉이 발견한 건 생동감이며, 그녀는 이 생동감을 다양한 방식으로 향유한다. 예술가와 지식인이 집합된 웨스트사이드에서는 돈과 사회적 지위로 꽉 찬 풍경을 발견하며 “진짜 세상의 맛”을 알았다는 사실에 심취하고, 동네인 브롱크스에서는 친구들과 거리를 누비며 사람들의 발랄함에 사로잡히고, 루이슨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연주회에 갔을 때는 음악에 대해 다양한 사색에 잠기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 때의 경험은 우연치 않게 사회인이 된 고닉의 지친 마음을 토닥이는 위로로 변하게 된다. 가지각색의 일을 겪으며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없음을 직면하며 냉소에 빠지지만, 마치 탐험가처럼 뉴욕 이곳저곳을 누볐던 젊은 날의 경험이 고닉이 외롭지 않도록 곁에 머물러주는 것이다.


 

가면 갈수록 사회 변두리로 향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이 응어리진 쓰린 가슴을 달래주는 건 오직 도시를 가로지르는 산책뿐이었다. 사람들이 계속 인간으로 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반백 가지 방식, 변화무쌍하고도 기발한 그 생존 기법들을 거리에서 보다 보면 팽팽했던 무언가가 느슨해지고 넘칠 듯 찰랑대던 게 빠져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 북적대는 거리에서만큼 혼자인 적은 없었다. - 20쪽

 

 

고닉이 뉴욕에 대해 말할 때 가장 핵심적으로 여기는 가치는 우정에 있다. 그녀에게 우정은 “우리 자신의 감정적 무능―공포, 분노, 치욕―을 인정하는 솔직함”에서 만들어지며 이를 통해 결속이 가능해진다. 내면에 자리 잡은 깊숙한 부끄러움까지 터놓는 것은 사람과 사람을 끈질기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기반으로 고닉은 뉴욕에서 맺거나 끊어지거나 지속하고 있는 우정을 두고 이렇게 서술한다. “뉴욕의 우정은 울적한 이들에게 마음을 내주었다가 자기표현이 풍부한 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는 분투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정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고닉의 절친 레너드다. 사는 게 적성에 맞지 않다고 투덜거리는 고닉과 그 누구도 사는 것과 맞지 않다고 답하는 레너드는 시시콜콜하거나 깊이 있는 대화가 잘 오가는 사이다. 시대에 따른 결혼관의 변화, 읽고 있는 책과 관련된 농담 등 지면에 등장하는 고닉과 레너드의 대화는 이들의 관계가 얼마나 편하고 돈독한지 잘 보여준다. 레너드와 돈독한 만큼 그와의 우정도 소중했던 고닉은 자신과 레너드를 두고 아주 멋진 표현으로 설명한다.


 

레너드와의 우정은 내가 사랑의 법칙을 들먹이면서 시작됐다. 사랑의 법칙엔 기대가 수반된다. “우리는 하나야.” 나는 레너드를 만나자마자 결론을 내렸다. “너는 나고, 나는 너야, 서로를 구원하는 게 우리 의무고.” 이런 감상이 헛다리를 짚은 것임을 몇 해가 지나서야 깨달았지만, 사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이라는 영토를 힘겹게 횡단하다가 국경이 맞닿는 곳에서 이따금 만나 서로에게 정찰 기록을 건네는 고독한 두 여행자다. - 58~59쪽

 

 

친구와의 사랑이 레너드와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진중하거나 유쾌하면 좋겠지만, 우정의 유효기간은 섣불리 재단할 수 없다. 반대의 예시로 고닉은 서로가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오랜 우정을 지킬 것이라 믿었던 에마와의 추억을 덧붙인다. 에마와 고닉은 각각 부르주아와 페미니스트, 결혼과 이혼, 대학원생과 프리랜서라는 명칭으로 분리된다.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지만, 두 사람은 “늘 보편적인 조건 가운데 각자가 처한 상황이 해당되는 부분들을 퍼즐처럼 하나씩 맞춰가는” 사이로 정의된다. 다른 만큼 언쟁이 자주 벌어졌지만 고닉은 이런 식의 몰입을 사랑했고 에마와 함께 있으면서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후에 에마와의 우정이 “로맨틱한 사랑과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었다.”고 표현할 만큼 강렬하게.

 

이 우정은 10년이나 지속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깨지고 만다. 에마의 남편과 지독한 논쟁을 벌인 적 있던 고닉은 이 일을 계기로 에마가 자신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운이 나쁘게도 고닉 역시 자신이 극찬한 여성해방 운동가의 저서를 읽고 에마가 비웃었던 기억을 소환하며 마음이 상하고 만다. “숲의 빈터를 무자비하게 뒤덮어버리는 식물처럼 우리 사이의 간극이 우리를 덮쳤다. 그 긴 세월 나를 휘두르고 신나게 하던 우정이 순식간에 소용을 다한 것처럼 느껴졌다.” 우정이 사라진 자리는 지난 추억을 곱씹다가 공허해지는 마음으로 대체된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핵심은 사랑하는 이가 존재할 때 (최선의 자아까지는 아니더라도) 표현하는 자아가 꽃을 피우리라는 기대다. 모든 것은 그 활짝 핀 자아에 얹힌다. 하지만 각자의 내면에 있는 그 불안한 것, 유동적인 것, 변덕스러운 것이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만개한 자아를 꾸준히 갉아먹고 있다는 어떡해야 할까? - 87쪽

 

 

끈질기게 엮여있다가도 너무나도 쉽게 끊어지는 우정의 형태는 뉴욕을 누비면서 불특정 다수와 마주칠 때 고닉이 보이는 태도와 닮아 있다. 공사장 근처에 놓인 보행자용 판자 위를 걷다가 마주친 낯선 이와 손을 잡지만 대개 침묵을 유지하며 그 위를 건너거나, 우연히 세 번 만난 피자 배달부와 대화를 나누거나, 문득 자신에게 말을 건 행인에게 “쓸데없는 깨달음”을 주는 방식으로. 때문에 고닉이 말하는 우정은 단순한 친구를 넘어 한 번이라도 스친 적 있는, 매일매일 도시를 가로지르는 개성 강한 다수로 확장된다. 이 우정은 군중이라는 이름으로 뭉텅이가 되었다가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고 다시 뭉치는 운동성을 가진다.

 

 

우리는 모두 세계 각지의 수도에서 길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배우와 점원과 범죄자, 반체제 인사와 도망자와 불법 체류자, 네브래스카 게이들과 폴란드 지식인들, 그리고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들까지. 이들 중 절반은 화려한 빛이나 범죄와는 무관하게 살아갈 테지만―나머지 절반은 나 같은 사람, 그러니까 도시를 걷는 자가 될 것이다. 누군가의 창의성에 또렷이 각인될 끝없는 군중의 끝없는 행렬에 이렇게 합류하게 될 것이다. - 108쪽

 

 

『짝 없는 여자와 도시』는 함부로 영원을 말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끊어질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성별이나 나이, 계층에 상관없이 그저 얼굴을 마주하는 타인과의 순간을 소중히 한다. 고닉의 서술대로 바라보자면, 타인과의 연은 우정이라는 이름을 달다가 스스로 이름표를 떼어버리기도 하는 능동적인 성격을 지닌다. 비단 한 개인에게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니 슬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언제든 우정이 만들어질 가능성, 당장이라도 서로가 서로의 동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본다면 오히려 설렘이 앞서기에.

 

 

우리는 계속 함께 걷는다. 나란히, 묵묵히, 끊임없이 형성 중인 서로의 경험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목격자로서. 대화는 언제까지고 깊어져만 갈 것이다. 설령 우정은 그렇지 않더라도. -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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