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나를 뒤돌아본다. 여름의 풍경이 낯선 얼굴처럼 그려지다가도 어느새 작은 창을 열어 나를 환기한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여름 내내 해왔던 일들을 향해 물끄러미 얼굴을 내민다. 또렷한 것도, 괄목할 것도 없지만 무언가 일을 했다. 나의 의지만으로 시작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니까 여름은 당신이 이 세상에 보낸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장. 잠긴 문이 잠긴 채로 저물어가더라도 그건 모두 당신이 쓴 편지들에 대한 답장. 어느 골목에서 멈칫했던 시간들이 얼마 뒤 먼 고장에서 비로 내리게 되는 일 혹은 이제 그만 살까? 우리 참 많이 살았다고 유리창에 대고 고백하는 일도 당신이 오래전에 쓴 편지들에 대한 답장들
- <여름> 부분
아직 당신에게 보내지 못한 답장이 많아서 당신을 그리워하던 시간마다 불안했다. 글자를 새겨 넣을수록 부족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를 대신해서 답장을 보낸 여름이라니. 어째서 나도 알지 못하는 답장을 당신에게 보냈는지, 마치 나에게만 비밀로 하자는 약속처럼. 우리 참 많이 살았다고 고백하는 날이 오면 여름에게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럴 수 없다면, 내가 앞으로도 여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먼 고장에서 비를 맞으며 살고 싶다.
비에 온몸을 젖게 하여, 혼자 적고 감추었던 답장들로 가득해진 여름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런 마음을 흉내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여름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일은 공허하다. 나의 여름은 언제나 나에게 벅찬 일이다.
다시는 살아나지 않으려 애쓰는 일 그렇게 반짝이는 일 그렇잖아 여름은 울고 나면 친절해지지 비누가 그랬고 책상이 그랬고 폐허조차 그런걸 그렇게 좀 죽어도 괜찮다면 어떤 눈물이 반쯤 올라오다 멈추어 선 채 몇 개의 계절을 살더라도 그것은 아주 먼 고장에서는 눈이 내린다는 소식을 듣는 것과 같은 것 질문과 대답이 그렇게 여러 해를 떠돌고서야 여름을 기다리곤 했지 그래도 여름이 돌아오지 않으면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잊으면 되고 눈동자도 손가락도 없이 기린이 되는 노래 바람이 불어서 나는 자꾸만 당신에게 계몽되고 있어 바다 너머로 기린을 보러 가고 싶어
-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7> 부분
당신과 내가 함께 울었다면 여름이 조금은 더 친절했을까. 덜 그리워해도 괜찮았을까. 당신과 다시 살아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래, 먼 고장에서 눈이 내리든 말든 그게 뭐가 어쨌다고, 그런데 나는 아직도 여름을 기다린다고, 여름이 내게 돌아오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고 내지르고 싶다.
여름에 만나 여름에 헤어져서, 비누보다는 구체적으로, 책상보다는 추상적으로 여름을 그려본다. 내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 잊는다 해도 나는 기다릴 것이다. 기다림 속에서는 모든 것이 친절해진다고 믿는다. 어느 초원에 쓰러진 기린의 한없이 길어지는 목을 멀리서 지켜보는 일. 무엇도 해줄 수 없어서 무엇도 돌아오지 않는 일.
마주 앉은 네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동안 너와 나의 등 뒤로 세상도 잠시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내가 살던 집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고, 꽃들이 피었다 졌다 한다. 그렇게 계절이 몇 번을 왔다 가는 동안 시소를 탄다. 이 세계는 내릴 수 없는 세계. 그러는 동안 저녁이 오고, 밤이 오고,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자란다. 자라서 우리는 날마다 삶으로부터 외로워진다. 멀어진 채 잠든다. 잠들며 새로운 별을 떠올린다. 균형은 움직일 때만 존재하는 질서 어디서나 시소의 세계는 시작된다. 어제의 시소는 녹슬고 오늘의 시소는 이미 낡았다. 꽃 피는 집들은 이제 없다. 우리는 허공에서 춤춘다. 이 세계는 이제 안전하지 않다. 안전하지 않아서 또 우리는 즐겁다.
- <시소의 세계에서 우리는> 전문
너의 등 뒤로 잠시 보였던 세상을 너의 세상이라고 넘겨짚었던 날에 꽃들도 피었다 졌다. 너의 세상을 볼 수 없었던 날보다 너의 세상이 내 손가락 사이로 걸려 넘어질 때 나는 외로웠다. 균형이 무너진 관계이기에 즐거웠다.
새로움이 더는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날까지 걷고 싶었다. 그런 날이 오면 헤어지겠지만 그런 헤어짐은 우리에게 새로운 균형이 되어줄 것 같다. 여름의 끝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 홀로 균형을 잡는다. 서로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나가는 아찔한 불균형을 뒤로하고. 너의 손톱이 녹슬어 간다. 어제가 아니었다면 오늘이었을 일이다.
잠을 자면서도 시소에 올라타는 일.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