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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기꺼이 속아주게 되는 광고들 [문화 전반]

건너뛰기엔 너무 내 얘기 같아서

by 강신정 에디터
2025.08.25 14:50



몇 달 전 종합 마케팅 대행사에서 면접을 보았다. 결과는 탈락이었지만 1시간가량의 면접이 내게 남긴 건 분명 있었다. 면접이 끝나고 메모장에 적어둔 “광고는 번역”이라는 다섯 글자가 그것이다. 옆에 앉은 면접자가 한 말이었다. 좋은 광고란, 브랜드가 하고 싶은 말을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언어로 번역해 들려주는 광고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건 어떤 언어일까?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자기 자랑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사람은 자기 자신을 뒤로 둘 때 가장 돋보이는 법이다. 자기 이야기를 할 듯 말 듯 해서 오히려 더 궁금해지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처럼, 브랜드 자랑은 미뤄두고 듣는 이를 앞세우는 광고 세 편을 소개한다. 스킵 버튼은 잠시 넣어두고 광고에 숨은 당신의 이야기를 찾아보길 감히 권한다.

 

 

 

스위첸 – ‘집에 가자’


 

 

 

아파트 브랜드지만 아파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광고로 유명한 스위첸. 한 집에 살아가는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이란 서로 다른 문명이 부딪히고 이해하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낸 ‘문명의 충돌’ 편(2020)은 유튜브 조회수 3,000만 회를 훌쩍 넘겼다.

 

광고에서 ‘스위첸’은 늘 마지막에 로고로 등장하는 것이 전부다. 아파트 이야기를 하지 않는 아파트 광고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나 역시 그랬다. ‘문명의 충돌’ 편의 부부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모습을 보여준 ‘신문명의 출현’ 편(2023)을 보고 감동했다. 결혼은 물론 출산 생각이 전혀 없고 오히려 임신-출산-육아가 지나치게 낭만화되어 있다고 보는 나지만, 스위첸의 광고에 내 사상 너머의 감정이 반응했다. “너 이런 감정 알걸?” 하고 속삭이는 광고에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8월 방영된 ‘집에 가자’ 편은, 한 집에서 사는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낸 이전 광고들에서 한 차원 나아간 듯하다. 이제 스위첸은 자신의 본질인, 집 자체의 의미를 조명한다. 퇴근길 지하철의 사람들, 엎드려 자는 학생들, 전역한 군인, 귀국행 비행기의 승객들, 어린이집 하원길에 동생을 껴안는 아이를 포함한 우리의 모습이 차례로 지나간다. 그리곤 “오늘도 집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 마디와 스위첸 로고로 광고는 끝이 난다. 스위첸이 얼마나 넓은지 어떤 기술로 지어지는지 따위의 이야기는 없다. ‘집에 가고 싶다’는, 누구나 아는 그 마음을 보여주며 집의 의미를 되새길 뿐이다. 집이란 고단한 일상 끝에 만나는 그리운 안식처라고 말하는 이 광고는, 아파트 브랜드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광고일 것이다.

 

 

 

퍼시스 – ‘Better ME@office’


 

 

 

사무 가구 브랜드 ‘퍼시스’가 올해 내보인 광고 역시 과시는 접어둔다. 대신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여준다. 여느 직장인이 그렇듯, 회사 가기 싫다는 이야기로 광고는 시작한다. 곧이어 일하기 싫다는 말의 뒷면을 파헤친다. 자기 밥그릇만 생각하던 시절을 지나 직급이 올라가면서 이젠 팀원들 생각도 하게 되었다는 팀장. 하는 일 없는 것 같은데 월급을 받아 “개꿀”이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더 잘 해내고 싶다는 신입사원. 각박한 회사 속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는 과장까지. (첨부한 영상은 팀장 편. 신입사원 편과 과장 편은 퍼시스 유튜브 채널에서 감상할 수 있다.)

 

사무실 안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직장인들을 내세운 이 광고는, 더 성장하는 직장인처럼 퍼시스 역시 더 나은 오피스를 만들겠다는 포부와 맞닿아 있다. 이 광고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취준생이었다. 출근하기 싫다는 말조차 자랑 같이 들리던 때였기에, 이상적인 직장인의 모습을 그려낸 이 광고가 괜히 아니꼬웠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세 번은 돌려보았다. 나 역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꼭 직장인이 아니더라도 지금 있는 곳에서 더 나아지고 싶다는 욕망. 그건 사무 가구 자랑으로는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다. 퍼시스는 사무 가구와 사무실을 넘어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더 나아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모두의 근본적인 욕망을 판 셈이다.

 

 

 

세이코 – ‘하고 싶은 일은, 지금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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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계 브랜드 ‘세이코’는 조금 더 야망 있다. 매년 6월 10일을 ‘시간의 기념일’로 지정한 일본에서, 시간의 기념일을 온전히 세이코의 날로 만들어 버렸다. 매년 시간의 기념일을 맞아 시간에 대한 광고를 제작한 덕이다. 시계의 입으로 시간을 말하겠다는, 그리하여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선점해 버리겠다는 영리하고 대담한 전략이다.

 

다음은 세이코가 올해 제작한 신문 광고의 카피 일부.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나가 버린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더 낫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모든 시간은 서로 이어져 있다.

 

실패처럼 보이는 순간조차 배움이며,

미래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시작이다.


하고 싶은 일은,

지금 시작하자.


오늘은 시간의 기념일.

 

- 번역: 스투시 (블로그 @stussyblog)

 

 

세 개의 침이 정직하게 움직이며 시간은 흐른다. 고장 나버린 시계 속이 아닌 이상, 시간을 멈출 수는 없다. 일이 잘 되어도 잘못되어도,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묵묵히 나아간다. 그것이 야속하지만 오히려 용기가 될 수도 있다고 세이코는 말한다. 오늘 실패해도 내일은 또 온다. 오늘 성공해도 내일 실패할 수 있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떤 절망은 이유 없이 온다. 그렇다면 오늘 무언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때론 거창한 명분보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 해야 하는 이유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광고에 세이코 시계가 얼마나 잘났는지 말하는 대목은 일절 없지만 시간을 잘 보내는 법을 제시해 주는 세이코의 시계는 어쩐지 무언가 다를 것만 같다.

 

물론 알고 있다. 세 광고 모두 브랜드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그럼에도 좋다. 15초, 30초, 1분, 혹은 종이 한 장만으로 사람들에게 닿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여서 좋다. 그 흔적을 매만지며, 저 듣기 좋은 말들에 기꺼이 속아주게 된다. 못 본 척하기엔 너무 내 얘기 같다는 핑계를 대며.

 

아파트 브랜드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 사무 가구 브랜드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 시계 브랜드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우리 삶에 일정 부분 유효하다는 것. 분명 존재하지만 아무도 찾아낸 적 없는 교집합을 발굴해 내는 일은 참 멋지지 않은가. 그 비좁은 영역을 찾아 헤매며 오늘도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기 위해 세상을 둘러보고 있을 모든 광고인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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