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제품부터 신선한 먹거리까지, 오늘날 택배가 나르지 못하는 물건은 거의 없다. 어젯밤 주문한 물건이 오늘 새벽 문 앞에 놓여있는 택배의 신속함은 무언가를 바라는 아이의 울음에 즉각 응답하는 부모의 예민한 귀마저 닮았다. 어쩌면 택배란 필요한 사람의 부재를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편리하게 대체하는 방식일 테다. 편리함이 모든 것의 우선이 되는 요즘, 이제 택배가 취급하지 못할 물건은 없으니, 택배로 취급할 수 없는 것들 중에는 오직 마음만이 남는다.
정호승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 2022)를 읽는다.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햇빛에 대하여
바람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눈빛에 대하여
내가 지상에 떨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그동안의 모든 기다림에 대하여
견딜 수 없었던
폭풍우의 폭력에 대하여
- <낙과(落果)> 중에서
우선 책임에 대해서 말해볼까. 책임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품는 숭고한 마음이다. 그 마음은 쉽사리 말할 수 없는(혹은 말해선 안 되는) 아주 무거운 것이라서, 그 존재를 안아 올리다가 함께 “땅에 떨어”질 각오까지 하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아이를 안은 부모는 아이에 대한 책임감으로 맨땅에 자신의 뒤통수를 내어주더라도 끝까지 아이를 보호하며 넘어질 것. 그러니 차마 수확되지 못한 채 땅에 떨어진 저 과실들은 통통하게 살찐 자기 자신과, 자신을 돌봐준 “햇빛”이나 “바람”까지 몽땅 품으려다가 먼저 낙오된 숭고한 책임감의 존재일 테다. 책임은 숭고하고, 숭고한 만큼 위험하다.
과실이 빛과 바람마저 머금으려는 마음이 책임이라면, 한 인간이(“내가”) 다른 인간을(“당신을”) 온전히 품으려는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은 나의 추락을 바라고 있는 세상의 모든 “폭력” 앞에서도 기꺼이 당신을 품고 두 배로 무거워지는 것이며, 그 무게를 끝내 줄이지 않는 것이고, 어쩌면 “하늘에서 땅으로 툭 떨어짐”으로써 가까스로 완성되는 것이다. 책임과 사랑은 필사적으로 함께 하는 추락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결로서의 마지막 추락이 아니라, 순환으로서의 첫 번째 낙하다.
내가 이 땅에 떨어진 것은 오로지 너를 위해서다
내가 한알의 낟알로 땅에 떨어져
고요히 기도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너의 가난을 위해서다
첫눈이 내리고 무서운 겨울이 오기 전에
내가 너를 다시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난여름 내가 너를 위해 견디며 익어갔기 때문이다
한알의 곡식이 익어 땅에 떨어지는 것이 죽음이라면
나는 지금 너를 위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너를 기다림으로써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 <낙곡(落穀)> 중에서
낙과 이전, 그러니까 당신으로 나를 살찌우기 위해 나는 무서운 겨울과 뜨거운 여름을 “견디며 익어”갔을 테다. 그렇게 충분히 익은 나는 “오로지 너를 위해서” 기꺼이 추락한다. 통증과 함께 죽음이 천천히 다가오는 그 절박한 순간, 나는 당신이 언젠가 잃어버렸을 “너의 가난”을 위해서, 가난을 회복한 당신이 삶에 더 간절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요히 기도”를 시작한다. 목숨도 내어줄 정도의 기도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이다. 당신을 위해 나의 삶을 투신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에만 오히려 나는 간절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나의 추락―기도를 통해 마음을 회복하면 당신은 새롭게 살아갈 테다. 그렇게 살아가던 당신이 새로운 사랑을 품고 추락하는 순간, 당신이 사랑한 또 다른 누군가가 힘써 살아갈 것이다. 삶과 죽음이 순환하며 세상에 이어지는 거대한 “기다림의 사랑”. 이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고 말한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이자, 더 나아가 죽음에까지 초연해지는 부처의 사랑이다.
꽃이 피었다고 또 우느냐
꽃이 졌다고 또 굶느냐
꽃이 피면 용서한다고 약속해놓고
꽃이 졌다고 아직 용서하지 못하느냐
용서하지 못하면 잊기라도 하여라
잊지 못하면 용서라도 하여라
그래도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하지 말아라
오늘 내가 봄바람에 홍매화로 피어나
너를 바라보는 게 바로 용서가 아니더냐
죽고 싶을 때가 가장 살고 싶을 때이므로
꽃이 질 때 나는 가장 아름답다
죽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두려워하지도 기다리지도 말고
꽃이 질 때 너도 나와 아름다워라
- <매화불(梅花佛)> 전문
우리는 이제 아름다운 꽃이 낙곡의 죽음(혹은 추락한 사랑) 위에서 피어남을 안다. 그러니 “꽃이 피었다고” 혹은 “졌다고” 그 마음이 더 서러워 울거나 굶을 수도 있게 됐다. 하지만 그런 마음마저 잔잔하게 달래는 이가 부처이고, 시인이다. 사랑의 과정에서 괴로움(꽃이 피고 지듯)이 생겨나면 그 고통마저 용서하라고, 그러나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하지 말아라”고 읊조리는 시인의 말은 체념이 아니라 차라리 위로다. 삶과 죽음의 날카로운 경계를 “죽고 싶을 때가 가장 살고 싶을 때”라는 문장으로 부드럽게 허물면서, 그 모든 것을 끝내 “아름다워라”고 말해주는 사랑의 시. 이런 시를 만나면 곱게 접어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 당연한 것인데, 시인은 그마저도 완곡히 고개를 젓는다.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 <택배> 전문
사랑의 시 꽁꽁 싸매 보냈더니 뜯어본 이에게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어디서 보냈는지조차 알 수 없고, 심지어 아무리 포장지를 벗겨도 내용물이 나오지 않는다. 사랑을 보냈는데 받는 것은 슬픔이라니, 이 말도 안 되는 배송 사고는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필요한 사람(몸)의 대신’으로서의 택배는 기능할 수 있지만, ‘필요한 마음의 대체’로서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 멀어진 신체 대신을 신속하게 보낼 순 있어도 멀리 떨어진 마음은 정확하게 보낼 수 없다는 것이 마음 택배의 한계다. 대신 보낸 마음은 겨우 도착해도 쉽게 분실한다.(“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한계가 언제나 절망으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당신에게 불충분한 택배를 받았을 때 우리는 보내준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나를 먼저 자책하게 되겠지만(“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그래도 그 마음 읽어내기에 간절해져(“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내게 마음을 보내온 이를 찾아 “눈길을 걸어”갈 결심마저 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 택배는 보내는 이와 받는 이 사이에 놓인 결심의 길을 부지런히 오간다. 오가는 발자국이 녹인 땅 위에서라면 낙과도 낙곡도 다시 자란다. 슬픈 사랑이 무럭무럭 자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