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가 청춘을 단지 열망만을 표현했다면, 그 영화는 성장을 위해 필요한 고통을 간과한 것이다. 새싹이 돋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겨울은 그 자체로 성장통이다. <태풍클럽>은 한낮의 열정을 표현하기보다는, 태풍의 사정권 안에서 투쟁하는 아이들을 보여준다. <태풍클럽>에서 태풍은 일주일을 머물다 갈 뿐이지만, 학교에 갇힌 아이들은 짧은 시간 속에서 성장적인 도전을 맞이한다. 학교에 갇힌 아이들은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고립된 세계를 구축하는 듯 보인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어른들은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며,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마찬가지다.”라 일축한다. 이외에도 학교에 갇힌 아이들의 바깥에는 리에가 헤매고 있다. 어른의 욕망과 고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의 교집합 속에서 리에는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
오전 10시 30분, 태풍이 찾아오기 직전이다. 이부자리 속을 빠져나온 리에는 학교를 향해 달려간다. 관찰자의 눈은 리에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본다. 흔들리는 프레임, 인물과 지평선은 극단적으로 떨어진 채다. 마침내 리에가 학교 정문을 통과했을 때, 카메라는 아주 조그마한 인물을 화면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공간으로 밀어낸다. 방치된 인간, 영화는 롱 쇼트로 거대한 갈림길을 보여준다. 리에는 한 발도 내딛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카메라는 리에의 로우 앵글로 표현한다. 갈림길은 단지 두 가지의 선택지가 아니라, 존재적 유예가 맞닿는 현실의 순간이다. 리에가 친 몸부림이 고립이었다면, 갈림길이 롱 쇼트로 표현된 것은 청춘의 헤맴과 맞닿아 있다. 영화는 리에와 거리를 두면서, 왜 헤매는지를 묻지 않고 어떻게 헤매는지를 조망한다.
학교의 바깥에서 리에가 헤매는 동안, 태풍이 찾아온 학교 안에서 아이들은 리에와 다른 고립을 맞이한다. 태풍으로 인해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돌아가지 못한 아이들은 학교에 갇혀,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이때 <태풍클럽>에서 가장 주요한 비판인 ‘폭력성’의 문제가 언급된다. <태풍클럽>은 단순히 폭력의 기원을 젊음의 무질서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영화는 억눌린 공간에서 표출되는 감정, 폭력이 개인의 성장을 가로막는 순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켄의 뒤틀린 애정 표현, 미카미의 불안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만 카메라는 이들을 먼 곳에서 바라볼 뿐이다. 즉 이미지가 전달하는 충격을 강요하지 않고, 방향성을 잃어가는 운동으로 불안감을 조망하는 것이다.
억눌린 공간에서 아이들은 발악한다. 미치코를 향한 켄의 뒤틀린 표현, 아이들 사이를 채우는 웃음들, 이름 모를 감정들로 학교는 서서히 물들어간다. 태풍이라는 고립, 도와줄 어른의 무시까지, 모든 것이 학교에 뒤섞인 채, 아이들은 학교 강당으로 향한다. 미카미는 프레임의 한가운데에서 어른의 말을 곱씹는다. 결국 청춘의 끝은 어른인 척하는 것일 뿐일까. 학교를 지배하던 어둠이 물러간 것은 강당에서부터다. 미치코는 공연을 주도하듯, 관객에게 인사를 건네고 같이 있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다시 농구 골대를 향해 쓰레기를 던지는 미카미를 조명한다. 한 걸음씩 시선이 다가가고, 강당의 위에서 아이들이 춤을 추며 옷을 벗는다. 짜임새를 찾아볼 수 없는 아이들의 몸부림과 함께 레게 음악이 강당을 메우고, 이들의 춤이 점점 중앙을 범하기 시작한다. 농구 골대가 만든 제한적 화면에서 아이들은 모델처럼 자세를 취한다. 농구 골대가 가져오는 제한적 프레임은 일종의 틀이다. 틀 안에서의 자유는 해방될 순간을 기다리고, 틀의 바깥으로 빠져나오려 한다. 태풍이 극심해질 무렵, 아이들의 불안감은 성장을 동반하기 시작한다. 빗소리와 아이들의 노래 소리로 뒤덮어진 태풍의 눈으로부터 다시 쏟아지는 폭우까지의 짧은 시간에서 아이들은 벌거벗은 채로 바깥을 범한다. 카메라는 고정된 채, 아이들의 전경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켄은 드디어 폭력을 동반한 언어에서 벗어나, 아이들과 함께 안녕을 말하기 시작한다. 뒤틀린 표현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짓이자, 타인을 동반한 치유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관조적인 카메라는 무심한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이면서, ‘한때’가 간직한 찰나를 표현한다.
같은 시각, 리에는 도쿄에서 어른의 욕망에서 벗어난다. 집으로 향하기 위해서 기차역으로 향하지만, 폭우로 인하여 모든 운행이 중지된 후다. 리에는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방황하며, 비를 맞으며 노래를 부른다. 도쿄의 풍경은 무관심한 타자의 전형이다. 오카리나를 부는 어른, 경찰 마네킹은 리에가 기대기엔 충분치 않다. 오히려 어른의 세계에서 나타난 무용한 질서를 상징한다. 다르게 말하면, 리에는 도쿄라는 탈출구 속에서도 고립의 무게를 체감하는 것이다. 타인에게서부터 찾아온 상처는 성장을 동반하지 않는다. 성장통은 견딜 수 있어야만 한다. 어른의 욕망이 점철된 도시는 리에에게 돌아갈 곳의 존재를 일깨운다. 마침내 리에에게 타인은 도피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아닌, 자신이 마주할 개별적인 존재로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성장이 유보된 아이가 있다. 미카미는 종의 죽음과 존재의 물음에 사로잡힌 채, 어른인 척을 반복한다. 한심한 어른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 혹은 생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의 논리를 구축한다. 하지만 태풍이 물러간 새벽, 미카미는 교실의 책상과 의자를 탑처럼 쌓아 올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강당의 장면처럼 피사체의 뒷모습을 조망한다. 미카미는 잠든 아이들을 깨우고, 죽음의 순서에 대해 논한다. 미카미는 말한다. “죽음은 삶보다 앞서 있다.”. 미카미가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다. 이 장면은 단순한 자살이 아니다. 미카미가 쌓아 올린 디딤대는 자살의 목적성이 아닌, 겪어야만 하는 시간의 상징이다. 시간이 완성되고, 성장은 예정된 끝을 맞이한다. 하지만 현실의 미카미는 여전히 고립된 아이이며, 유예된 젊음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추락한다.
<태풍클럽>의 불안함은 결코 아름답다고 추억할 만한 게 아니다. 성장이 유보되고, 고통을 겪어야 하며, 뒤틀린 표현들이 합쳐져 폭력을 일궈낸다. 영화 속 청춘은 이유를 묻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 헤매는가를 보여준다. <태풍클럽>이 논하는 청춘이란 인간이 타인의 관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각자의 불안정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말하고 있다. 영화관을 빠져나온 관객들은 오늘의 롱 쇼트를 사유한다.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불안감과 파열이 청춘인가. 기억의 롱 쇼트는 침묵한다. 우리에게 보여줄 것은 방향일 뿐,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