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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에 맞는 노래가 아니면 그냥 넘겨버리는 습관이 있다. 물론 아끼는 가수의 신곡 발표에는 트랙리스트를 전부 돌려보지만, 돌리는 동안 그 안에서도 좀 더 마음이 가는 노래가 결정되기 때문에 발매되는 노래를 차분히 다 듣는 건 큰 애정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가수들은 한 앨범을 발표할 때 트랙 순서를 짜는 것에도 굉장히 심혈을 기울인다고 한다. 곡의 순서가 아무렇게나 끼워져 있는 게 아니라 다 이유가 있는 배치라는 것이다. 그 의미를 정확히 알려준 앨범은 가수 로제의 < rosie >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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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ie


 

< rosie >는 2024년 12월 6일 발매된 앨범으로 로제의 첫 솔로 정규 앨범이다. 수록곡까지 총 12곡으로 구성되어 전곡 작사와 작곡에 참여했다. 물론 솔로로 내는 첫 앨범은 아니다. 첫 정규이긴 하지만, 그 전에 ‘on the ground’, ‘gone’ 등이 포함된 싱글 앨범 < R >이 있다. < R > 앨범으로 처음 솔로 등장했을 때도 굉장히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이번 앨범에서 행보는 선공개 곡 ‘APT’와 ‘number one girl’부터 타이틀곡 ‘toxic til the end’, 수록곡을 포함해 발매된 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모든 곡이 놀라움의 연속인 파급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앨범에는 로제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담겨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고, 경험해 본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을 지극히 솔직하게 풀어냈다. 솔직한 만큼 아프지만 찬란했던 어떤 시절이 실려있어 로제와 듣는 이 모두에게 의미 있는 앨범이다. 실제 연애 경험담을 연상하게 되는 묘사에 곡을 듣다 보면 빠져들게 되고 자연스럽게 가사를 검색하게 된다. 영어 가사이지만 언어로 막을 수 없는 짙은 호소력과 감정 표현 덕분에 영어 가사가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화자가 말을 건네는 투로 노래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서 먼저 사랑을 경험해 본 언니가 흥미진진하고도 슬픈 위로를 품은 이야기를 친근하게 들려주는 듯하다.


노래를 듣다가 건너뛰기를 서슴지 않는 나에게, 앨범의 전곡을 순서대로 재생해보고 싶게 하는 앨범이었다. 급기야 노래 가사까지 일일이 해석해 보고픈 욕구가 들었고, 로제가 전하는 사랑의 담화들을 나름의 소견을 더해 트랙 순서대로 늘어뜨려 놓아 보았다.

 

 

 

number one girl, 외롭지 않게 나를 계속 들여다봐 줘.


 

 

‘Tell me that you need me, Tell me that I'm loved’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줘,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

 

 

혼자가 되는 어떤 늦은 밤에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지만 무력하게도 외로움에 패한다. 사랑을 속삭이는 어떤 말들로 위로받기를 원하는 화자는 애원할수록 외로워지고 상대에게 목매게 된다. 화자도 그 끝없는 악순환 고리의 근원적인 문제 해결책은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있다. 평소에 많은 눈에 보이는 사랑을 받아도 어두움이 기저에 깔린 채 홀로 있는 밤에는 허무하게도 그 외로움과 알 수 없는 감정 사이 속으로 어김없이 빨려들고 만다. 그러니까 좀 사랑해달라고, 말하면서도 화자의 혼란스러움이 동시에 보이는 곡이다.

 

 


3am, 너 하나만 원하는데, 이게 그렇게 별로야?


 

 

‘The world can roll their eyes but there's no use. I just want it to be you When it's 3am.

(세상이 비웃어도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너야. 새벽 3시에.)

 

 

또 등장한 위험신호. (가사 중 red flag) ‘얘 또 저런다.’ 하고 세상이 눈을 굴리는 사랑에 알고도 감행하는 것. 지금 화자에게 필요한 건 화장을 지우고 잘자 인사를 해줄, 예쁜 말을 하고 못나게 울 수 있는 사람이다. 단지 그런 사람이고 그게 바로 사람들이 만류하는 상대이다. 모르고 하는 사랑이라면 순수하게 위험한데, 알고 하는 사랑이기에 더욱 위험하고 무엇도 화자를 말릴 수 없어 보인다. 남들 시선은 상관없대도, 둘만 사랑한다면 아무도 간섭할 수 없지만 이 화자는 왠지 혼자 목매는 것처럼 보인다. 자꾸만 외치는 ‘I just wanna to be you’에서.

 

 


two years, 계속 노력하고 노력하는데도 아직도 네가 눈에 선해.


 

 

‘Now you're invisible But the heartbreak's physical’

(지금 너는 보이지 않는데 내 아픔은 너무 잘 보여)

 

 

상대는 떠난 지 2년이나 되었는데 이 사랑은 도저히 죽지를 않는다. 헤어짐을 선언한 뒤 모든 게 말끔히 끝났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별의 속도는 제각기 다르고 아무도 그 끝을 예상할 수 없다. 다짐 뒤에 완벽한 지움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새로운 사람도 만나보고, 머릿속에서는 상대방의 장례식까지 치뤘는데도 그 정도로 노력했는데도 오히려 더 강해지는 상대에 대한 그림자가 화자를 지배하고 있다. 도대체 어떤 노력을 시도해 봐야 말끔해질 수 있을까.

 

 


toxic til the end, 신사 숙녀 여러분 소개합니다. 제 전 ‘독’을.


 

 

‘I never wanna see your face And then I couldn't wait to see it again’

(네 얼굴 다신 안 보고 싶은데 사실 그게 너를 어서 보고 싶단 뜻이야.)

 

 

사랑의 강렬함으로 시작된 중독 반응과 끝내는 지긋지긋한 해로움으로 이어지는 관계. 처음부터 끝까지 명백한 ‘독’이라고 칭할 수 있는 관계는 흔하지 않다. 이 관계가 독인 걸 알면서도 이미 중독되어서 깔끔하게 끊어낼 수 없는 감정까지 결국엔 독으로 작용한다. 뭐가 좋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뭐가 나쁜 건지는 명백히 아는, 그런데도 질질 끌 수밖에 없는 사랑에 명백한 잘잘못을 따지기는 어렵다. 혹 화자가 말하는 상대의 배려 없는 행동들이 없었다면, 화자는 상대방에게 끌려 했을까? 노래를 많이 재생해 본 지금은 그런 궁금증이 든다.

 

 


drinks or coffee, 에이 그냥 만나자. 그게 뭐든 왠지 기분이 좋잖아.


 

 

‘I'm feeling so good At a bad party’

(별로인 파티인데도 기분이 좋아)

 

 

많은 사람이 붐비지만, 상대만 뭔가 다른 빛을 낸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밤의 스위치를 바꾸어 놓았다. 이 재미없는 파티를 단숨에 이겨낼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 딱히 관계에 대한 정의는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너’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우리가 서로 끌려 한다는 긴장감만이 밤을 지배하고 있을 뿐. 그러니 술? 음료수? 뭐든 상관이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서로에 대한 눈치싸움!

 

 

 

APT, 내일은 자게 해줄테니까 일단 오늘 미쳐보자!


 

 

‘Red hearts, red hearts

That's what I'm on yeah

Come give me something I can feel’

(빨간하트, 내 마음을 보내는거야. 너도 내가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줘.)

 

 

당차다. 쿨하고 멋있다. 오늘 한 번 끝내주게 놀아보자고 하지만 그 말이 마냥 무책임해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고 답답함을 해소하는 느낌도 아니다. 그냥 ‘우리 잘 맞을 것 같은데?, 그걸 너도 알고 있잖아. 나와!’. 이 시대의 가장 쿨한 사랑 고백과 답장.

 

 


game boy, 넌 내게 상처만 줄거란걸 이젠 알아.


 

 

‘the way you say my name, Won't lie it felt amazing.

But you took my love for granted’

(네가 내 이름을 부를 때면, 솔직히 말할게. 끝내줬어. 근데 넌 그런 내 마음을 당연하게 여겼잖아.)

 

 

상대가 뿜어내는 엄청난 매력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매력에 당해낼 수가 없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꿀 발려진 행동 끝에 절대 변하지 않을 게 있다는 걸. 화자는 이제 일방적으로 상처받는 그런 게임이 질려 보인다. 받는 다정과 아픔을 벅차게 저울질하다가 그 끝을 아픔으로 정의 내리는 화자의 용기는 대단하다.

 

 


stay a little longer, 좀만 더 느리게 가줘. 내가 뭘 해볼수라도 있게.


 

 

‘Speak a little softer, so I don't have to answer And make it okay before you can say’

(좀만 상냥하게 말해줘, 그럼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네가 가기 전에 다 괜찮다고 말해줘.)

 

 

이별의 순간에서 상대를 붙잡는다는 건 그 아픔이 감히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용기 있는 일이다. 상대의 차가운 마음을 알겠는데도, 사랑스러운 미래가 보장되어있지 않는데도 뭐라도 해보려는 마음이다. 전반적으로 명령조로 되어 있지만, 전혀 단호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너무 간절해서 애절해 보인다. 평생도 아니고 ‘조금’만 더 내 옆에 있어 달라는 말은 단 1초라도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단순히 네 옆에 있기만이라도 하고 싶어 보인다. 화자 본인이 가장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애원하는 말들은 그 어떤 상태의 말보다 진심일 것이다.

 

 

 

not the same, 네 사랑이 변했는데 넌 정말 모르는거야?


 

 

‘But some things just change overnight

I don't know who you think you're kiddin', babe’

(근데 어떤 것들은 하룻밤 사이에 변하더라. 도대체 누굴 속이고 싶은 거야, 자기야.)

 

 

변한 사랑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그 변한 사랑을 받아내는 상대이지 않을까? 끊임없는 부정과 슬픔 속에서 혼자 마음을 다잡고 변해버린 사랑을 되돌려 보려 노력하고 끙끙 앓다가, 결국은 체념한다. 이렇게 느끼기 전에 상대가 그 유효기간을 먼저 말해주면 좋으련만, 어쩐지 상대도 본인의 마음을 또렷이 하지 못하는 듯하다. 마음이 변하는 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날지 몰라도 그 마음을 인정하는 건 하룻밤 사이에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 많은 결심이 필요한 일인데 눈앞에 상대방 모습 곳곳에서는 자꾸만 신호를 보낸다. 그런 비참하고 안쓰러운 마음을 혼자 삼켜내야 한다.

 

 


call it the end, 이제 이 관계를 뭐라 부를까?


 

 

‘I'm a better me because of you Yeah, we're at a crossroad’

(너 덕분에 더 나은 내가 되었어. 근데 지금 우린 갈림길에 서 있어.)

 

 

사랑에 얽혀있는 관계들을 국어사전에 등재된 단어처럼 정의 내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애매모호한 것의 연속일 뿐이다. 어느 단계 하나 쉽게 구분 지을 수 없지만 그런 애매한 감정 속에서도 우리는 사랑을 한다. 그럼에도 끝을 봐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우린 그 끝을 매듭짓는 말들을 주고받는다. 그래도 쉽게 놓아지질 않으니까 그 질문의 답을 상대에게 계속 물어본다. ‘전남친, 남자친구. 연인, 친구... 뭐라고 불러야 해?’ 같은 질문 속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음을 절실히 느낀 건 화자 본인일 것이다.

 

 

 

too bad for us, 안됐다. 우린 그런 건가 봐.


 

 

‘Now the roses don't grow here’

(이제 여기엔 장미가 자라지 않아.)

 

 

"사랑은 사랑이 원하는 대로 작동하는 건데 그게 우리한테는 적용되지 않나 봐."라고 담담히 내뱉는 화자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다. 앞서서 애쓰고 발악하고 슬퍼했던 모습에서 조금은 차분해진 상태로 관계의 끝을 인정하는 모습이 왜인지 씁쓸하기도 하다. 잘해보고 싶었는데 잘되지 않은 마음을 머금고 어쩔 수가 없다고 한다. 그 초연함이 무겁긴 해도 그들에겐 따가울 듯 밝게 빛나던 사랑의 순간이 있었으니까, 애써 가볍게 보내주려 노력한다.

 

 

 

dance all night, 걱정없이 춤춰볼래.



 

‘I would let my feelings lead me’

(내 감정이 나를 이끄는대로 냅둘래.)

 

 

내가 원하는 것이 도통 무엇인지 모르겠을 때만큼 무기력해지는 순간이 또 없다. 그럴 때는 그런 걱정마저도 하고 싶지 않다. 그저 몸을 흔들고 무엇에도 억압받고 싶지 않아진다. 나조차도 나를 방해할 수 없도록. 그렇게 춤추고 나면 건강한 생각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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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트랙을 곱씹고나니 정말 직설적이어서 놀라웠다. 가사가 단박에 이해되는 건 그만큼 가사에 그림을 잘 그렸다는 것이고 그만큼 보편적인 감정과 상황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팝스타 궤도에 안정적으로 안착해 있는 로제가 우리네와 같은 사랑을 하고 울고 웃는다는 게 큰 위로로 다가오는 듯하다.

 

사랑 앞에서는 직업도 지위도 그 무엇을 가졌든 누구도 우위를 선점할 수가 없다. 다들 비슷한 사랑 안에서 각자의 특별한 사랑을 일구어내고 다듬고 솎아내며 사랑한다. 그렇지만 특별한 사랑 속에서 비슷한 사랑을 보면 공감할 수 있다. 그렇게 사랑 안에서 또 사람들끼리 위로하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로제가 못난 모습도 눈이 부시게 사랑스러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노래라는 형태로 전해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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