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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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선, 코마로프, 역참에서, 크로머, 벌집과 꿀, 고려인, 그리고 달의 골짜기. 폴 윤의 일곱 단편은 모두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정체성과 관계에 대해 탐구한다. 전쟁이 남긴 상흔과 트라우마, 관계의 균열과 개인의 고립,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에 대한 응시도 함께다.

 

그러나 결국 소설이 향하는 곳은 고통스러운 삶을 비관하는 체념이 아니라, 어떻게든 삶은 계속 흐른다는 불변의 진리다. 그 진리를 결코 놓지 않고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사람들을 비추며 우리의 마음에 작지만 깊은 낙관을 남긴다.

 

 

 

떠남의 의미



 

보는 자신이 결국에는 퀸스를, 어쩌면 자신이 태어나서부터

 

십팔 년 동안 살았던 한국까지도 그리워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는 동안 그곳들은 그가 떠올리려 애쓰는 얼굴들처럼 멀어졌다.

 

마치 그가 한때 살았던 그 장소들이 다른 누군가의 고향이었던 것 같았다.

 

19p.

 

 

'보선'의 주인공 보는 정착지를 찾기 위해 떠난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18년을 보내고, 그 이후의 12년은 줄곧 뉴욕 퀸스에 살았다. 뉴욕의 한 무역 회사에서 일하다 자신도 모르게 장물 거래에 휘말려 10달간 교도소에서 지내게 된다. 18년, 12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보낸 곳이지만 한국과 뉴욕은 고작 10달이 지나가는 동안 그에게서 멀어진다. 자신이 살던 곳이 아니라는 느낌까지 들게 될 만큼 두 장소를 빠르게 잊어 간다.

 

어떤 장소나 집단에 온전히 속한다고 느끼는 소속감의 부재가 그로 하여금 한국과 뉴욕을 잊고 다른 곳으로 떠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있을 곳, 속할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다. 그렇게 보는 출소 후 뉴욕으로 향하지 않고 낯선 도시로 떠난다. 목적지는 교도소에서 알게 된 로저가 말해준 캘리스라는 도시다. 로저의 설명에 따르면 캘리스는 오래전 캐나다에 살던 프랑스계 사람들의 공동체가 국경을 건너와 농사를 위한 토지를 사들이며 형성된 곳이다. 오래된 소도시들이 모여 있고 들판, 농장, 온실이 많은 교외 지역으로 묘사된다.

 

그가 완전히 낯선 곳인 캘리스에 이끌려 머물기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 지상에 속해 있지 않은 사물들처럼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는 건초 더미,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것만 같은 광활한 하늘, 그리고 머리 위로 고요하게 날아가는 새들. 머무르던 장소에서 멀리 떠나 주변을 관찰하며 자신도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지하게 된 순간들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지금 이 순간 발을 딛고 있는 장소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것. 설령 떠나온 곳에서의 삶이 잘 풀리지 않는다 해도 다시 돌아가거나 아니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나도 된다는 것. 그는 자신이 떠나고 머물고 돌아가는 것 모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인간은 정착과 소속감을 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갈망을 충족하기 위해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늘 떠나고 돌아오는 과정의 반복이더라도 삶은 계속 흐른다는 진리가 그를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한다.

 

보의 떠남이 소속감과 정체성에 대한 고뇌에서 비롯되었다면 '크로머' 속 해리와 그레이스의 떠남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와 연결된다. 40대 중반의 부부 해리와 그레이스는 탈북자의 자녀들로, 그들의 부모님은 북한을 떠나 런던 남서부의 대규모 한인 공동체에 정착했다. 두 사람은 런던에서 무사히 성장해 결혼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함께 가게를 운영해왔다. 그런데 어느 해 겨울, 그들이 있던 곳과 가까운 곳에서 폭탄이 터지는 일이 발생한다. 연이어 부모님 네 분 중 세 분이 2년 안에 병세로 인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일련의 사건들 이후로 해리는 그레이스와 슬픔을 나누고 의지하며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무도 그들이 탈북자의 자녀인지 모르는 곳, 철저히 익명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 일상적인 차별이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버리거나, 지금의 삶에서 잠시 벗어나 함께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볼 수도 있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관계의 불안정과 균열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 가족이 세상을 떠나자 두 사람은 서로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른 뒤에 잠시간의 여행을 떠나고 나서도 엇갈림은 지속된다. 각자가 우선시하고 있는 삶의 고민, 바람, 목적 같은 것들이 어딘가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자각하게 될 때 불안은 밀려온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고 삶이 흐르는 것이 당연하듯, 관계도 변화하며 계속 흐른다. 다툼과 화해, 갈등과 이해, 균열과 회복을 끊임없이 반복해 왔을 해리와 그레이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함께 걸어가는 관계에는 평탄한 순간도, 굴곡진 순간도 있다. 그리고 그 굴곡에는 부부라는 관계 밖에서 두 사람 각자가 겪는 고뇌와 위기도 분명 존재한다. 각자 삶에서의 떠남과 돌아옴으로 인해 관계가 어긋나는 순간이 생겨날 수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 엇갈림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해리 역시 크로머로의 떠남을 통해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바람이 아닌, 그레이스는 요즘 어떤 삶을 살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살기를 바라고 있을지 고민하는 해리의 모습에서 희망을 읽는다.

 

 


과거와 미래, 균열과 회복



 

주연은 니콜라이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 노래하던 여자에게서 시작하면 된다고.

 

정말로 찾아보고 싶다면, 거기서 시작하면 될 거라고.

 

87p.

 

 

일곱 단편의 공통점은 어떻게든 삶의 빈 공간을 채워 미래로 나아가려는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디서 온 사람인지,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기를 바라고 있는지 끈질기게 고민하며 나아갈 방법을 모색한다. '코마로프'의 니콜라이는 어릴 적 다른 가정으로 입양되었지만 30살에 탈북자인 친어머니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근원과 시작점을 알고자 하는 갈망과 그 실현이 스스로를 원하는 미래로 데려다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듯하다.

 

'달의 골짜기'의 은혜가 동수에게 전화를 한 행위도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로부터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희미해졌고, 현재는 어릴 적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을 삶을 살고 있기에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 역시 지난할 수밖에 없음을 은혜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삶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기울고 부서져도 스스로를 다시 만들어내는 달처럼 자신의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 한 걸음씩 내딛는 모습이 나직한 위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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