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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당신의 목소리는 안녕한가 [사람]

이름에 관하여

by 김동연 에디터
2025.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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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름은 점점 약점이 되어간다. 우후죽순 생겨나는 아파트는 익명성을 낳았고, 표현의 자유를 등에 업은 인터넷은 든든한 유모가 되었다. 익명 사회에선 자신을 숨길수록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환경이 한층 조성된다. 토론장인지 투기장인지 모를 그곳에선, 용기와 객기를 구분치 못하는 사용자들이 으레 상주한다. 그들의 무기는 언변도 논리도 정신도 아닌, ‘숨긴 이름’이다. 그것을 벗 삼아 정신승리의 일환으로 폭력과 비방을 일삼는다. 과거에는 이러한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실명제 같은 수단이 논의되었으나, 근원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기묘하게도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거치며 묘안을 알아냈다.

 

 

 

칠흑이 남긴 선물


 

한동안 우리는 얼굴을 잃었다. 건강을 위해 착용한 복면은 그 대가로 표정을 앗아갔다. 설상가상으로 (‘물리적 거리두기’가 되어야 했던) ‘사회적 거리두기’는 그 명칭에 걸맞게 인간관계를 해쳤다. 타인은 지옥이었다. 하처에 기침 소리가 들리면, 상대에 대한 걱정보단 자신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혹은 그럴 수밖에 없도록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초기 확진자는 불가피하게 가번호를 부여받았지만, 사람들은 기어코 실체를 들춰내어 주홍 글씨를 새겼다. 혹자는 사태의 종착지로 관계의 종말을 예견키도 했는데, 당시엔 과장이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시국을 견뎌내면서 관계의 소중함을 인지하게 되었다. 평소 연락하지 않았던 주변인에게 괜히 안부를 전했고, 일상에서 마주하던 이들과 단절되자 허전함을 느꼈다. 이윽고 당연시 여겼던 불특정 다수가 그리워졌다. 출석부를 부를 때마다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학우들, 여기저기서 ‘이모’를 외치는 선술집의 고주망태들, 야구장 뒷골목에서 선수들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 스쳐 가는 풍광 속 우리는 얼마나 많이 서로를 불렀는가. 아무리 개인주의로 치닫는 사회일지언정, 인간은 상호 의존하는 존재임을 우리는 깨달았다. 앞으로 유사한 상황이 없다고 확언할 순 없다. 그때마다 우리는 다시금 과거를 조명할 것이다. 칠흑에 가까웠던 그 시대가 남긴 선물은 관계가 호칭(互稱)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이름 부르기


 

호명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적힌 이름과 불린 이름. 상황에 따라 그 쓰임새가 달라지기에 어떤 방식이든 타인에게서 언급된다면 좋은 징조이다. 그럼에도 후자가 빈번한 삶이 조금은 더 윤택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한다. 물론 역사에 족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어디든 기록되는 편이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인물이 그러하겠는가. 또 고흐나 모딜리아니처럼 생전에 거론되지 못하다 사후에 유명해진다면, 좀 허망하겠는가. 간혹 종이나 화면에 딱 붙어있는 글자를 볼 때면, 그것은 얼핏 죽은 듯 누워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족을 달아 ‘적힌 이름’을 깎아내리고, ‘불린 이름’을 고집하는 이유는 후자에서 주객 간의 관계성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안드레 애치먼의 원작 소설보다 우위에 점하는 부분은 이와 상통한다. 영화 속 엘리오(티모시 샬라메)와 올리버(아미 헤머)가 서로에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장면이 애중한 이유는, 그것이 발화되어 다가오기 때문이다. 문자로 기록된 이름은 독자의 목소리와 혼재돼 읽히지만, 소리로 인식되는 이름은 온전히 그들만의 목소리로 공명한다. 그 메아리의 끝에선 ‘나의 이름을 너에게 불러줌으로써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된다’는 분착한 주제가 못내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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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어가는 중에 일부는 한 편의 시가 은은히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이름 부르기’에 관해 논하는데, 김춘수 시인의 <꽃>을 지나치긴 어렵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하략)

 

이름은 고유명사라지만, 그 속성은 아는 사람에게만 국한된다. 대상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저 사전 깊숙한 곳에 박힌 난자(難字)에 불과하다. 역으로 이름은 실재를 인식하는 가장 용이한 방식이다. 누군가를 떠올렸을 때, 동시에 우리는 이름을 상기한다. 고로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곧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시인의 눈부신 시구는 주체와 객체(화자와 청자)를 바꾸어도 동일한 감동을 선사한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꽃’이 되는 이유가 호명이듯, 내가 그에게서 꽃이 될 수 있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름을 일으키는 방법


 

이따금 연락처를 뒤적이다 보면, 동명이인 때문에 혼선을 겪곤 한다. 중학교 친구인지, 군대 선임인지, 무념하게 저장한 아무개인지, 누가 누구인지 아득해진다. 프로필 사진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는 있으나 그마저 없으면 알 도리가 없다. 그저 불성실하게 번호를 저장한 자신을 나무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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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벙벙히 있을 순 없다. 가장 좋은 수는 이참에 한 명씩 연락해보는 것이다. 이왕이면 전화로 말이다. 딱딱한 메시지로 질문하기보다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물어보는 편이 재밌지 않겠는가. 시국이 어수선한지라 상대도 분명 반가워할 것이다. 불러보자. 당신의 목소리로 건네는 호명만이 누워있는 이름을 일으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의 귀는 준비됐다. 당신의 목소리는 안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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