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독특하고 선명한 색채와 파격적인 전개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고히 한 영화감독이다. 스페인의 민주화 이후 모비다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그는 새로운 스페인의 젊은 세대로서 마드리드의 저항 문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끈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내전과 독재의 트라우마와 그로 인한 개인의 우울한 내면을 투영했던 이전의 스페인 영화들과는 달리, 그는 키치적인 미장센 속에서 전통적 남성상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여성상의 묘사를 제시하며 스페인의 변화한 시대상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그중에서도 그는 특히 ‘어머니’와 ‘모성’에 대해 다룬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88),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패러렐 마더스>(2021)가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가 영화라는 언어를 통해 탐구해온 ‘모성’을 들여다보면, 그가 ‘어머니’란 존재에 부여한 확장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스페인의 어머니,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88)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는 그것의 미장센 자체로 곧 새로운 스페인을 의미하는 영화이다. 주인공 ‘페파’가 사는 집에는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가축들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식물들이 늘어져 있고, 마드리드 거리에는 게임 사운드 같은 음악이 흐른다. 이처럼 조화되지 않고 장식적이며 인위적인 공간적 요소들은 ‘키치적’인 미장센으로서, 이전의 스페인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알모도바르는 이러한 도시 공간과 미장센을 통해 스페인의 새롭고 밝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프랑코 독재 시대의 종말 이후 변화하는 스페인 사회에 대한 묘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페파’는 스페인의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준다. 극중 ‘페파’는 바람둥이 애인인 ‘이반’과 연락이 닿지 않아 불안하고 짜증스러운 감정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 그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이반’을 찾은 뒤에도 그에게 매몰찬 이별을 고하며, 홀로 아이를 키우기로 다짐한다. 가모장으로 거듭나며 주체적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페파’의 모습은 그 자체로 전통적인 스페인의 여성상과는 대조를 이루는, 새로운 여성상의 등장이다. 그러한 점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은, 영화 속 갈등의 중심이 되는 ‘이반’이라는 남성 인물이 곧 스페인의 전통적인 ‘마초적 남성’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에 대하여 극 중 여성들은 주체적인 활약을 통해 승리를 이루어내고, 더 이상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속 갈등관계의 주된 축인 ‘페파’와 ‘루시아’의 대립은 언뜻 한 남성을 쟁취하기 위한 여성들 간의 싸움으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이반’에게 대척하기 위한 두 여성의 연대로 귀결된다는 점이 흥미롭기도 하다. ‘여성 간의 연대’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주요한 메시지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페파’는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이 곧 ‘노아’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는 곧 ‘페파’의 테라스가 ‘노아의 방주’로서 여성들을 구원하는 공간이 되며, ‘페파’는 곧 가모장으로서 그 여성들 모두를 포용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결국 스페인의 새로운 국면을 반영한 특유의 미장센 속에서 이 블랙 코미디 영화가 보여주는 어머니의 ‘모성’이란, 기존의 마초적 남성에 대한 전면적인 반격과 능동적인 가모장으로서의 새로운 여성상으로 귀결된다.
‘모성’의 본질을 초월한 모성애,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알모도바르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어머니’에 대한 본질을 교묘히 비틀어 표면적으로는 우리가 익히 아는 ‘모성애’에 대한 숭고함과 위대함을 느끼게 만들지만, 실은 그러한 규정성을 뛰어넘어 어머니가 가진 ‘모성’의 스펙트럼을 넓힌다.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배로 낳은 자식에 대한 모성만을 발휘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혈연관계로서의 본질에 크게 개의치 않으며, 어머니와 자식으로서의 역할 수행에 따라 모성애를 발휘하는 존재이다.
극중 주인공인 ‘마누엘라’는 불의의 사고로 아들 ‘에스테반’을 잃었다. 물론 그녀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 빠져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이내 자식에 대한 애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오히려 자신과 전혀 혈연으로 얽히지 않은 ‘로사’의 아들을 ‘에스테반’처럼 기르는 모성애를 보여준다. 혈연으로 규정된 모자관계가 아닌, 이를 벗어난 관계임에도 진정으로 서로를 포용할 수 있는 관계인 것이다.
또한 이 영화 속에서 얽히고 설킨 인물들은 표면적으로는 우연히 서로를 만난 관계이지만, 그 이면에는 슬프고 충격적인 사건들로 인해 연결된 존재들임에도 서로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컨대 ‘우마’와 ‘마누엘라’는, ‘마누엘라’가 ‘우마’로 인해 자식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친구로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로사’는 ‘마누엘라’의 남편과 아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마누엘라’가 그녀를 친언니 (혹은 어머니)처럼 극진히 돌보는 모습이 나온다.
관계의 본질을 규정해보자면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관계들은 그 규정성을 지움으로써 서로를 포용하는 관계로 나아간다.
애도하는 존재로서의 어머니, <패러렐 마더스>(2021)
<패러렐 마더스>는 ‘어머니’와 ‘모성’에 대해 다루었던 감독의 전작들에서 부분적인 요소를 끌고 오면서도, 그것들을 역사적 맥락 위에서 새롭게 조립하여 ‘어머니’란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부여한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어머니’란 곧 애도하는 존재이다. 주로 생명을 창조하는 존재로 여겨지는 ‘어머니’가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는 죽음을 목격하고, 그것을 증언하며, 묻힌 죽음의 이야기를 파헤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렇듯 죽음과 어머니라는 존재를 잇는 것은 고향에 묻힌 조상들의 유해 발굴 작업에 대해 논의하던 ‘야니스’와 ‘아르투로’의 모습에서 둘의 격렬한 섹스 씬을 지나 ‘야니스’의 출산 장면으로 이어지는 시퀀스로 표현된다.
생명을 창조하는 ‘어머니’와 생명의 소멸인 ‘죽음’, 이토록 대조적인 두 존재를 긴밀히 연결시킨 아이러니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어지는 오랜 역사적인 비극과 관계된다. 이 대목에서 알모도바르는 스페인 내전과 파시즘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전쟁과 학살의 역사 속에서 여성들, 어머니는 남편과 자식의 죽음을 목도하는 존재였다. 또한 그것에 대해 증언할 수조차 없었던 시간이 꽤나 길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야니스’처럼 그 죽음을 파헤치는 인물로 인해 비로소 그 죽음을 애도할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한편 ‘야니스’와 ‘아나’의 두 딸이 뒤바뀐 사건은 영화의 초중반부까지 지극히 개인적인 두 여성 간의 일로 보였지만, 이 역시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폭력의 메타포임을 알 수 있다. ‘야니스’는 아이가 자신과 ‘아르투로’ 중 그 누구도 닮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닮은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받아들인다. ‘야니스’의 아버지는 내전 당시 학살의 피해자였기에 그녀는 아버지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나’는 집단 강간의 피해자로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기에 친딸이 아님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전의 역사와 여성에 대한 반복적인 폭력의 역사가 여전히 한 개인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여성들은 그러한 비극을 담담히 극복해나갈 것임을 암시하며, 이들에게 상처입힌 역사와 폭력의 비극을 애도하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처럼 알모도바르는 그의 영화를 통해 지속한 모성에 대한 탐구에서, ‘어머니’란 존재에 대한 인식을 점차 확장시켜왔다. 주체적인 가모장으로서의 어머니, 규정적인 관계와 본질을 뛰어넘어 포용력을 갖춘 어머니, 그리고 죽음을 애도하며 비극을 극복하는 어머니. 이러한 인식의 확장은 스페인의 사회 변천사와 무관하지 않다. 독재 이후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며 변화한 사회상에 부합하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으며, 다양성을 포용하고 과거의 역사를 청산하는 시대로 나아가며 어머니에 대한 인식도 점차 변화해왔다. 그러한 스페인의 변화 과정은 우리나라의 역사와도 매우 닮아 있기에, 알모도바르의 이러한 모성 탐구는 한국 관객들에게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가 바라보는 ‘어머니’가 어떤 존재로 확장되고 나아갈 수 있을지 기대가 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