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심연으로부터 올라온 편지
깊은 구렁텅이 같은 모습을 한 사랑 이야기가 읽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가장 좋아하는 책인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관련해 이것저것을 검색하다가 한 블로그 포스팅을 보았다. '히스클리프의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오스카 와일드의 사랑도 분명 응원하고 싶어질 거예요'. 그렇게 오스카 와일드의 <심연으로부터>를 마주하게 되었다.
<심연으로부터>는 오스카 와일드가 자신의 애인 앨프리드 더글러스와 그의 주변인들에게 적었던 옥중 편지의 모음집이라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더글러스와 그에 대한 사랑 이야기이고 그가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다. 우리나라에서는 <옥중기>라는 제목으로 여러 차례 번역되었다. 하지만 구체적이고 비일상적인 어떤 장소에 대한 특정적인 글쓰기라기 보다는, 연인에게 보내는 처절한 연애편지이자 오스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올라오던, 자기 삶에 대한 깊고 진한 증상적인 글쓰기였기 때문에. 자신의 죄에 대한 참회록이 아닌 명상록에 가깝다는 평을 받는다. 삶과 고통, 예술 등을 대한 태도로부터 시작해 자신만의 오롯한 세계관에까지 가닿는 글이 세상에 내놓아진 것이다.
사랑과 고통, 순환
“고통은 하나의 긴 순간이기 때문이지. 고통은 계절처럼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린 다만 그 다양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그 순간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라고. 우리에게 시간은 전진하는 게 아니야. 순환할 뿐이지.”
“죽기 전에 ‘자신의 영혼을 소유한’ 사람이 지극히 적다는 것은 진정한 비극이야. 에머슨은 언젠가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행위보다 귀한 것은 없다’라고 말했지.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아.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야. 그들의 생각은 다른 누군가의 의견이고, 그들의 삶은 모방이며, 그들의 열정은 인용일 뿐이지.”
<심연으로부터>에서 그는 삶과 고통에 대해 성찰하며, 이를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감옥에서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재평가하고, 고통을 성장과 변화의 필수 요소로 인식한다. 와일드는 특히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삶의 깊이를 이해할 수 없다"는 대목에서, 고통을 예술적 영감과 인간적 성숙을 위한 중요한 경험으로 여긴다.
사랑과 자신이 견고하게 지키던 일상의 붕괴로부터 찾아온 고통. 그 고통은 오스카 와일드의 육체를 무너뜨리고 영혼을 미약하게 만들었으나, 그는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한다. 바로 고통이 그를 정화했고, 마냥 가볍기만 하던 과거의 실수를 성찰하게 했으며, 새로운 영적 성장으로 이끄는 힘이 고통에 있었다는 것. 그는 또한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이해가 깊어졌다고 말하며, 인간의 나약함과 고통에 대한 수용이 결국 더 나은 삶을 살게 한다고 덧붙였다.
내 안으로부터 숱하게 역한 방식으로 올라오던 취기 같은 공포와 고통에 대해 반추해 본다. 끝없이 나를 괴롭히던 이유 없는 그리움과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 그리고 나를 오해하는 세계로부터 목소리 없이 고함을 치던 날들. 그것들로부터 올라오던 고통. 고통은 순환적인 것이라는 그의 말,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고통받던 순간이 있었기에 그렇지 않은 순간을 감사하게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고통이 다시 먹물 숨어들듯 일상 속으로 속 깊게 다가올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욕망은 종국에는 하나의 질병이나 광기, 혹은 그 둘 다가 되고 만 거야. 난 점차 다른 이들의 삶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내가 원하는 곳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삶을 계속 이어갔어. 평범한 날의 사수한 모든 행위들이 한 인간을 형성할 수도 해체할 수도 있고, 비밀스러운 방에서 행한 것을 언젠가는 지붕 꼭대기에서 큰 소리로 외쳐야 할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지. 한마디로, 난 나 자신의 주인이기를 그만둔 거야. 나는 더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니었고,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지. 난 당신이 나를 지배하는 것을 허용했고, 당신 아버지가 나를 협박하도록 내버려두었어.”
“나는 사랑의 기운이 없이는 살 수 없어.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아야만 하는 사람이야. 그로 인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지. 사람들이... 비난하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게. 그는 내게 사랑을 선물해주었다고. 외로움과 오욕 속에서, 끔찍한 속물세계와 석 달간 치열하게 싸운 끝에 난 자연스럽게 그에게 돌아갔던 거야. 물론 나는 종종 불행할 거야. 하지만 난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네. 그가 내 삶을 망가뜨렸다는 사실이 그를 사랑하게 만든 거야.“
그러한 고통은 대개 '무언가를 사랑했음'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심연으로부터>에서 오스카 와일드는 앨프리드 더글러스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 그는 더글러스와의 관계를 아름답고 매혹적인 사랑으로 묘사하지만, 종국에는 그 관계로 인해 파괴적이고 비극적인 결과가 생겨났다고 고백한다. 와일드는 더글러스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자신이 감옥에 가게 된 것을 비난하며 분노한다. 특히 더글러스의 이기적인 태도와 물질적인 집착, 그리고 아버지와 대적하기 위하여 와일드를 이용했다는 점에 대해 감옥 생활 중 깊은 배신감을 줄곧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와일드는 그에 대한 애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연인의 아름다움과 그가 가진 무한한 매력을 여전히 찬미한다. 그는 더글러스와의 관계가 그를 사회적으로 처참히 무너뜨린 동시에, 예술적인 영감과 삶에 대한 새로운 긍정적 태도를 가지게 해주었다고 여겼다. 와일드에게는 더글러스를 향한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며, 이러한 감정의 복합성이 <심연으로부터>를 더욱 깊이 있는 작품으로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과 증오는 대척점에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고통스러워지나. 너무 사랑해서 밉고, 너무 미워서 결국은 사랑하게 되는 관계들이 삶 속에는 도처에 흩뿌려져 있다. 고통은 기화하면 사랑의 이름을 가지고. 사랑은 다시 증오가 되고. 증오의 살점을 떼어내면 뼈가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랑이 심장 박동에 맞추어 경련을 일으킨다. 오스카 와일드가 <심연으로부터>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삶의 '연속성'과 '중첩성'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과 향을 가진 감정과 경험들이 삶 속에서는 서로 몸을 함께 하고 있다고, 그렇게 쌓여있고 불투명하게 서로의 빛깔을 반사하고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편지 내내 삶, 고통, 증오, 사랑, 예술과 관련하여 중첩적으로 여러 색과 빛을 산란하는 인간의 일생에 관해 이야기한다.
심장이 녹슬지 않는 사랑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기억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도 행복함을 느끼는 왕자. 심장이 녹슬거나 녹지 않던 사랑. 자기 재산과 사회적 명성, 사랑까지 마구 퍼다 주고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던 더글러스를 위해 오롯한 자기 자신까지 내던지던 오스카 와일드. 어쩌면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이 적었던, 행복한 왕자와 같은 사랑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스카 와일드의 <심연으로부터>는 내면적 성찰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원하는 이들이 읽어보면 좋을 테다.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그의 진술을 서술되는 이야기에 따라 탐닉하면서, 그 과정에서 고통의 승화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사랑의 탄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