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개가 묻는다. “그래서 당신은 행복한가?” <환상의 마로나>는 개의 목소리를 빌려 인간에게 질문을 건넨다.
‘자신의 인생의 영화를 돌려보려 한다’는 말과 함께 마로나의 견생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9’, ‘아나’, ‘사라’, ‘마로나’ 총 네 번의 이름을 거치고, 불리는 이름에 따른 새로운 삶을 살았던 마로나에게 늘 한결같았던 것은 마로나의 마음이었다.
마로나는 언제나 제 옆에 있어주는 인간을 도리어 더 지키려했고, 사랑했다. 그와 함께하는 매 순간을 행복으로 느낄 뿐 아니라, 마로나의 우주는 그로 가득찼다. 마로나가 주인과 보냈던 시간을 우주 공간처럼 보이도록 연출한 것 또한, ‘반려동물의 세상엔 주인이 전부‘라는 말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마로나 옆의 인간들은 달랐다. 마로나처럼 무조건적인 사랑보다는 상황에 따라 사랑을 조절했고, 태도를 바꿨다.
꿈을 찾아 떠난 첫 번째 주인 마놀과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부인의 눈치만 본 두 번째 주인 이스트만, 그리고 모든 것에 빨리 싫증을 느끼는 소녀 솔랑주까지. 그들은 영원히 마로나와 함께할 듯했지만, 매번 마로나의 사랑이 더 깊었음에 틀림없다.
마로나는 로드킬을 당한 채 쓰러져 있는 순간까지 자신과 함께했던 인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행복했다 말한다. 우리는 반려동물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마로나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반려동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반려인만을 생각한다. 이는 인간의 마음으론 영원토록 불가능한 마음일 것이다. 무한정하고, 끝없이 지속되는 사랑이란 것은 인간의 노력으론 도달할 수 없다.
마로나가 개로 그려지긴 하지만, 마치 인간이 아닌 다른 차원의 존재,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존재로 느껴지기도 했다. 인간을 내려다보는 존재가 인간이 행복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한마디 던지는 것처럼 말이다.
마로나는 ’개는 늘 지금이 좋지만, 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보금자리가 있음에도 더 많은 것을 원하는데 인간들은 그것을 ‘꿈’이라고 부른다‘며, 어쩌면 영원히 꿈꾸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냉소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꿈은 인간의 입장에선 희망을 주는 좋은 것이지만, 그 꿈에 매달리다 보면 일상의 행복을 모두 놓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로나는 언제나 일상의 행복을 느끼며 살았다. 쓰레기 더미에서 지낼 때마저 인간의 손길 한 번이면 그를 계속해서 기다리게 될 정도로 그 일상을 긍정했다.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토록 깊은 사랑과 순간의 행복을 매 순간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마로나’처럼‘은 살 수 없다. 하지만 마로나와 비슷하게 살기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삶은 어쩔 수 없이 고통과 고난을 수반한다. 그것은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이기에 일상의 순간과 행복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행복을 지키는 것 또한 인간의 운명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