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불변한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재미없거나 따분한 성질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대신에 사람들은 진실을 찾는다.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 스스로 사실이라 믿는 것과 가깝다고 생각되는 진실을 내보이며, 더 나아가 다른 이가 사실이라고 믿을 때까지 목청을 높인다. 넌 틀렸고 난 맞았다, 넌 흑이고 난 백이다. 표리일체란 있을 수 없는 흑백논리. 이 현상은 놀라울 정도로 제약적인 면에서 강력하며, 마치 영화 '돈 룩 업!'이 희화화한 그것과도 같다. 자신과 타인의 사고회로를 차단하거나 심지어 때로는 없는 진실을 꾸며 내서라도 우기는 방식은 제약하기 위한 실로 창의적인 시도인 지라 '아' 하는 탄성마저 나온다.
아이유의 'Love Wins' 앨범 소개 메세지에서 첫 문장은 '누군가는 지금을 대혐오의 시대라고 한다' 이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고자 그가 내놓은 답은 앨범명과 같다. 아이유 외에도 오래 전부터 아티스트들은 아픔을 위로하는 메세지로 사랑을 택하곤 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 찬가가 승산이 높은 싸움일까에 대한 의문이 서리 내리듯 머릿속에 끼얹는다. 조심스럽지만, 앞선 말은 사랑이 혐오의 대항마로서 틀렸다는 이분법적인 얘기는 아니나, 더이상 최적의 선택일 수는 없지 않을까와 같은 담론을 던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충분히 대항할 만한지 그 가능성의 크기를 측정하는 것에서부터 첫 꽈리를 틀어야 한다. 현 시점에서 사랑은 혐오를 이길 만큼 거대한가? 온갖 sns, 유투브, 커뮤니티에는 화합의 메세지가 분단의 메세지보다 화제인가? 매일 저녁 8시 뉴스의 보도 내용들은 악행보다 선행 관련으로 가득한가? 주위에 어떤, 누구가 있느냐에 따라 사랑은 그 성질도 질량도 달라지겠지만, 일면에 대두되는 이슈들로 대상을 국한지었을 때, 어쩌면 그동안 사랑의 승산은 적었을지 모른다. 만약 그 반대라면, 아이유의 앨범명 또한, 'Love Wins' 같은 일종의 선언식이 아닌 'Love Wons' 였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는 일제에 맞서 뭉친 독립 투사처럼 의의있는 일이라 생각하기에 그렇다고 선택지의 축소나 삭제 따위의 억압적인 바램을 말한 것은 아니다. 되려 앞서 말했듯 역사적으로 보면 사랑은 해답이 맞아 보인다. 혐오가 득실한 세상을 지탱하는 건 늘 사랑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의문을 품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바이러스처럼 퍼져가는 혐오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에서 온다.
대표적인 원인으로는 SNS.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며, 사람들의 뇌는 상하관계를 통한 사고 방식을 선명히 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명품, 외모, 몸매, 심지어는 심신을 휴식하기 위한 휴가지에도 사람들은 SNS 속 사진만으로 그 사람과 자신의 능력을 상하로 구분짓는다. 그 능력이란 어떤 것이든 포함될 수 있다. 이성적 매력, 학력, 재력, 빠른 정보 습득 등 영역이 너무나 광활해 어느새 사람들은 자신을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그 끝은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에서의 시그네가 맞이한 최후와 같을 지 모른다. 보여지는 삶은 삶 자체를 경쟁으로 만들며 그 덕에 질투와 시기의 감정이 커지기에는 충분하다. SNS를 포함한 인터넷이 익명 간의 접근성을 높혔기에 같은 대상에게 비슷한 감정을 가진 이들이 똘똘 뭉치기 또한 더욱 쉬워졌다. 혐오가 혼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숏츠도 또다른 문제를 야기하는 기능 중 하나다. 독서가 멀어진 현 시대에는 시간 대비 하이라이트가 중요해졌다. 몇 줄씩 되는 글보다 한 장의 이미지가 주목 받는 흐름이다보니, 더는 맥락을 중요히 여기지 않는 경우도 생겨났다. '드라마 요약 (결말 포함)' 같은 류의 영상들은 어느 때보다 인기며, 축구 같은 스포츠도 전술 양상 보다는 골 장면만을 보길 원한다. 자극적이다. 개그 프로에서 농담 삼아 던진 말을 오묘하게 편집해 사람 하나를 인성 저질로 만드는 곳 또한 다른 어디도 아닌 지금 여기에 서 벌어지는 일이다. 사실성과 객관성이 무엇보다 중요시 돼야 하는 뉴스 기사에도 어김없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최대한 이슈될 만한 제목으로 사건을 꾸미고 명확한 사실 적시보다 빠른 요약과 기고가 우선시된다. 폭로라는 이름 하에 진행되는 스피드 게임. 사람들은 더욱 자극적인 게임에 빠져들고 혐오는 그것의 끝이다. 사실이 무엇인지는 혹한 이들에게 중요치 않다.
한편으로는 연예인, 정치인들의 끝없는 잘못이 사람들의 인내심을 떨어지게 했으리라. 더이상 믿었던 이에게 배신 당하기 싫은, 곪은 상처 같은 경계심이랄까. 시대가 이러니 만큼 비단 저들 때문에 생긴 마음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이슈몰이가 되는 직업군은 정해져 있으며, 가장 큰 파급력을 가진 것도 이들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향한 무차별적 폭언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죄가 없어도 돌을 던지는 이들, 잘못을 했더라도 그 이상의 벌을 바라는 이들, 마치 길가에 쓰레기 하나를 버린 것으로 지구 상의 가장 나쁜 환경 파괴범인 마냥 몰아가는 꼴은 지켜보는 입장에서 되려 이들에게 인내심이 떨어지게 한다. 지구 최악의 환경 파괴범이 된 이는 어느새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사람은 안바뀐다' 따위의 인생 조언을 듣게 된다.
억압된 삶을 살아온 이들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는 모르지만, 이들은 자신이 억압 받아 온 만큼 타인에게 드높은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고 마치 게임 캐릭터를 대하듯 인간의 양면성과 모순이라는 인간적 정체성을 도식하려 든다. 끊임 없이 경쟁시키는 사회적 시스템이 만들어낸 괴물들일까. 알 수 없지만, 혐오라는 시대적 흐름에 누구보다 빠르게 편승한(혹은 이끄는) 이들은 가장 자기 멋대로이며 가장 우울한 존재다.
시대가 스타를 원하지 않는다는 더콰이엇의 말에서 문장 구조를 빌려보자면, 대신에 시대는 강렬한 도파민을 원한다. 불닭볶음면 같은 매운 맛에 눈을 강하게 뜬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문화 생활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고음이 없는 평이한 음의 음악이 유행인 이유는 눈을 감고 귀를 연 자들이 음악을 듣기 때문이며, 사랑과 평화를 외치는 영화판이 버티는 이유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나와 스스로 영화관에 갇힌 자들이 영화를 보기 때문이라 믿고 싶다. 문화는 시대상이자 환상이다. 현 시대상을 투영하여 바라는 시대상을 보여주는 환상. 그 속에서 언젠가 나아질 세상을 고대하며, 바라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