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문화 초대에 응하던 순간부터 내내 떠올랐던 건 N번방 사건이었다. 이건 아마도 이 책을 신청한 모든 사람의 공통점이었을 것 같다.
당시 N번방은 한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의 파급력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꼭꼭 숨겨져 있던 민낯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다시 돌아보게끔 했다. 그 사건의 피해자는 대부분 10대였고, 가해자의 연령대는 매우 다양했다. 당시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단톡방에 잠입했던 기자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온라인 성 착취에 그치는 것이 아닌 피해자들(그 사람들은 이들을 ‘노예’라 불렀다)을 오프라인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어린 학생을 돌아가며 강간하는 영상은 실시간으로 채팅방에서 공유되고, 그들은 이 모든 걸 놀이로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피해자는 피해자의 신분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이 잔혹한 시스템 안에서 하나의 개인이 자유로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는 점차 소멸해갔다. 이 사건이 공개되면서 다행히 주동자들은 잡혔지만, 아직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엔 많은 이들의 권리를 죽인 가해자들이 더 많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여전히 피해자는 속출되고 있고, 아직도 온라인 성 착취는 활발하다는 것을.
<나를 지워줘>는 디지털 성범죄로 얼룩진 10대의 현실을 그린 이야기다. 디지털 장의사로 활동 중인 모리가 피해자의 불법 촬영물을 재유포했다는 누명을 쓰고 디지털 장의사를 그만두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양날의 검 같았던 디지털 장의사를 이번 기회에 그만두는 것과 동시에 같은 반 친구이자 오디션 프로그램 톱10에 오른 학교의 스타, 리온이 부탁을 해온다. 그녀의 부탁은 인터넷에 존재하는 자신의 딥페이크 영상을 지워달라는 것, 모리는 많은 고민 끝에 리온을 돕기로 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사건이 발생하면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몇몇 인물이 등장하는데 우린 여기서 모리, 진욱, 재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이유로 범죄를 정당화하는 진욱, 피해자이면서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한 재이, 스스로 피해자의 편에 서 있다 생각하지만 실은 방관자에 불과했던 모리. 이 세 인물은 현실과 지독히도 닮아있다. 진욱은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호소하는 가해자의 쓰레기 같은 서사와 닮았고, 재이는 자신이 받을 피해가 무서워 진실을 덮은 채 또 다른 피해자를 끌어들이는 인간의 모순이 보였다.
그리고 모리를 포함한 학교 친구들. 우린 이들을 보며 자신을 거울에 비출 필요가 있다. 내가 정말 가해자였던 적은 없는지, 피해받기 싫어 사실을 외면하진 않았는지,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았다는 알량한 마음이 방관자라는 사실을 덮진 않았는지.
몰카는 이전에 이미 친구들과 몇 번 대화했던 주제였다. 대화는 늘 현실의 불쾌함을 토로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회를 욕하고, 사람을 욕하다 종국에는 이미 온라인상에 각자의 몰카 하나쯤은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는 걸로 끝이 나곤 했다.
이 나라의 미친 기술 덕분에 사람 눈으로는 도저히 감별하기 힘든 카메라가 화장실에 얼마나 있는지, 그 화장실을 내가 과연 단 한 번도 이용하지는 않았는지. 하물며 학교 화장실에서도 몰카가 나온 적이 있다며.
얼굴이 빨개지도록 말을 이어 나가던 친구 A는 ‘난 그래서 가끔 화장실 들어갈 때 빠큐하는데’라며, 쌍욕은 덤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껄껄거리며 웃던 나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더 얹었다. ‘나는 얼굴만 팔리지 말자는 생각으로 고개 숙이거나 마스크로 아예 눈 빼고 다 가린다’고 말이다. 어릴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공공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며 화가 났다. 당연한 걸 누리지 못하는 이 현실이 너무도 끔찍했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게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우린 언제쯤 고개를 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