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릴 적 누구나 읽어보았을 동화였다.
토끼를 따라가다 이상한 나라에 빠져버린 앨리스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들을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그런 이야기. 우리는 그것을 모험이라고 배웠고, 꿈꿨다. 하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모험을 잊어버린 어른을 위로하듯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여전히 출판되며 다양한 삽화와 조금 더 다듬어진 문체로 우리의 곁에 함께 한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바라본 앨리스와 이상한 나라는 이상하게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앨리스는 왜 토끼를 따라가다가 구덩이까지 빠지는 거지? 앨리스는 왜 이상한 나라에서 아무거나 먹는 걸까? 저 대화는 내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지?
한참을 읽다가 생각했다. 내가 어른이긴 어른인 걸까. 말이 되지 않는 상황과 대화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의 삽화가 묘하게 나의 이해를 도왔다. 더 나아가 삽화에 그려지지 않은 상황까지 상상하게 했다.
수년 전, ‘아동문화 캐릭터’라는 전공 수업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영어원서를 읽었던 적이 있다. 그때 접했던 삽화들은 판타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본문에 적힌 그대로의 이미지였다. 판타지 동화에서 현실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달까.
하지만, 애나 본드가 그린 삽화들은 내가 어렴풋이 상상했던 판타지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는 것 같았다. 동글동글한 그림체와 화려하고 다양한 색채, 그리고 현실적이지 않은 거리감과 표현 방식들이 내가 생각했던 동화를 그대로 그려낸 듯했다.
그렇게 앨리스가 마주하는 이상한 나라에서의 일들에 빠져 있을 무렵, 나는 앨리스에게서 약간의 연민을 느꼈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적응하고 살아가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가고 있는 과정으로 느껴졌다.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앨리스가 가여웠다. 앨리스의 몸이 커졌다가 작아지고, 자신의 흘린 눈물에 떠내려가기도 하며 모자 장수와 동물들의 알 수 없는 대화를 알아듣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꼭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와 닮아 보였다. 현실도 판타지 못지 않게 알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니까.
‘이상한 나라’는 우리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익히고 적응해야 했던 어른의 세계 그 자체일 것이며, 이 세계는 혼란으로 가득 차 있고 뜻이 다른 것들을 같다고 믿는 사람들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책을 읽는 어른들은 알아차리게 된다. 그 사이에서 오직 아이들만이, 뜻이 통하지 않는 것들을 찾아낸다.
- 이다혜 작가(서문)
그래서 어른이 되어 읽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릴 적 꿈꿨던 모험과는 또 다른 모험을 꿈꾸게 했다. 혼란스럽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세상에서도 앨리스처럼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말이다. 이제는 하얀 토끼가 보이기를 기다리지도, 하얀 토끼가 나타난다고 한들 따라가서 이상한 나라로 떠나는 꿈을 꿀 수는 없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