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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할까. 손이 떨린다. 바로 눈앞에 꿈에 그리던 육지, 아메리카가 있다. 이제 배에서 내릴 준비를 한다. 그러나 아메리카를 본 순간, 사람들은 배 안에는 배에서 한 번도 내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영원히 망각한다. 영화는 아메리카에 도착한 빈 배 안에서 발견된 아기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일대기를 그와 절친했던 트럼펫 연주자가 들려준다. 나인틴헌드레드라는 이름을 갖게 된 아기는 자라서 혼자 피아노 치는 방법을 습득해 배 안 연회장의 피아니스트가 된다. 그는 육지로 나가보라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에도 배 안에 머문다. 배 위에서 태어나서 배 안에서만 산 그를 생각해보면 육지로 한 발도 내딛지 않았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그의 배는 도시였고, 세계였다. 판타지와 같은 피아니스트의 음악이 펼쳐지는 배는 이민자들의 꿈의 세계와 같고, 내릴 때의 육지는 선택해야만 하는 현실이 눈앞에 나열되는 하나의 ‘순간’이다.

육지 사람은 나인틴헌드레드를 결핍된 존재로 보고 나인틴헌드레드는 육지를 과잉된 세계로 본다. 그에게는 육지에서 살기에는 보편성의 결핍이 있었다. 나인틴헌드레드는 육지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사회에 대한 교육, 출생신고나 교육과 같은 사회로의 편입조건 따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지에서 바다를 볼 때 바다는 인생의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게 한다고 영화 속 이민자는 말한다. 이민자는 바다 위에서는 떠도는 존재일지 몰라도 육지에 발을 내딛으면 정착한 존재가 된다. 어쩌면 배 위에서는 그 중간의 순간에만 머물기 때문에 그런 이상적인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나인틴헌드레드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다는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이민자를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배 위에서 일생을 보내서 육지에서의 바다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이동의 순간에 정체되어 그 순간 순간만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마침내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음악을 녹음한 것을 가져다 주기 위해 육지에 내리기로 한 나인틴헌드레드는 계단 중간에서 그만두고 다시 배로 올라온다. 그에게 있어 육지는 무수한 경우의 수로 그를 시작과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세계였다. 그에게는 오히려 바다가 아닌 육지가 무한한 개수의 건반을 제시하며 연주의 불가능을 인정하라고 재촉했던 것이다.

그에게 인생이 광대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 것은 배에서 바라본 도시의 모습이었지만 그에게 와닿았던 의미는 바다를 보던 이민자의 그것과 달랐다. 그는 피아노를 칠 때 연회장에서든,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이 머무는 곳에서든 항상 즉흥적인 연주를 즐긴다. 순간이 제시하는 사람들의 인상과 분위기에 맞게 연주를 한다. 그런 그에게 아메리카라는 육지는 너무나도 많은 순간들이 제시되어 그가 갈 길을 잃고 방황하게 했던 것으로 다가왔다. 그는 외로워서 배 안의 전화기로 육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지만 그는 아무에게도 존재하지 않음을, 온전히 혼자임을 깨닫게 될 뿐이다. 그러면서도 배가 매초마다 바뀌는 좌표이동을 하는 순간 속에서의 그는 그 찰나를 연주한다. 그걸로 그는 혼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자각하여 순간에 머물렀다. 순간이라는 시간 속에 흡수되었다. 이것이 그가 끝까지 배에서 내릴 수 없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잃어버린 순수성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꿈과 판타지의 세계에 영원히 남았는지도 모른다. 재즈 연주자와의 대결에서 승패를 중요시 하지 않는 태도나 도시로 떠나라는 권유에 대처하는 태도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초연히 농담을 던지거나 피아노를 칠 뿐이다. 배에서 그는 사랑을 찾았고 사랑에 빠진 그 무한한 깊이의 순간을 유한한 건반으로 표현해낸다. 그에게 배는 그를 억압하는 감옥과 같은 공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사회체계, 보편성을 학습하지 않고 사회로부터 존재성을 인정받지 않아도 되는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하나의 세계였다. 배는 제한된 공간이지만 한정된 건반으로 무한한 곡을 만들 수 있는 예술의 공간이었다. 자신의 세계를 물리적 세계 바깥의 예술의 세계로 확장한 셈이다. 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은 육지가 들고 있는 삶의 무한한 가능성의 카드들과는 다르다. 그것은 파도치는 밤 배 안에서의 왈츠와 같이 형체는 없지만 부드럽고 따스한 어떤 순수이다.

그가 곧 폭파되는 배에서 죽음을 스스로 선언할 때에야 육지 사람인 트럼펫 연주자 맥스는 그를 이해한다. 그는 지금은 노쇠하여 곧 폭파될 배에 아직 남아있었다. 트럼펫 연주자는 그를 찾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한 뒤 나인틴헌드레드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건네주지 못하고 조각내버린 lp판을 배 안에 틀어놓는다. 트럼펫 연주자는 나인틴헌드레드의 순수를 그 음악을 트는 자신의 행위로써 깨달았을 것이다. 나인틴헌드레드가 음악으로 부드럽고 따스한 순수를 경험했듯 맥스 또한 친구를 구하려는 마음으로 그 순수를 느꼈다. 배에 탄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인생에 대한 동경이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고 모든 순수는 결국 인간과 삶에 대한 애정으로 귀결된다. 그러한 순수와 인간애를 실은 것이 바로 그 배였고 그게 바로 그 배가 영화에서 삶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찬 이민자들을 실어 날랐던 이유였을 것이다. 결국에 그는 한번도 육지에 내리지 않고 배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짐으로써 순수를 영원히 전설로 남기도록, 그래서 순수성을 계속 유지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육지에 발을 디디지 않은 이유는 지극히 보통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순수 때문이었다. 그것을 선택과 운명 사이의 어떤 좌표에서 항해하는 음표의 발랄함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순수는 현대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모두 정해진 목표를 갖고 일상을 반복할 뿐,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어쩌면 나인틴헌드레드라는 이름은 돌아갈 수 없는 1900년대, 그 시대를 대표한 이민자들의 꿈을 의미하고 있다. 2020년이 된 지금 전설 같은 나인틴헌드레드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그 무언가를 내포한다. 잠깐 눈을 들어 바다를, 육지를, 아니 각자의 세계 바깥을 바라보자. 우리가 잊은 무언가가 전설처럼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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