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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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아무도 모른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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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아무도 모른다, 誰も知らない, Nobody Knows, 2004)
 

 아무도 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도 알고싶어 하지 않아서 생긴 일들은 언제나 비극적이다. 무관심이 무서운 이유는 모두들 비극이 일어날 거라 짐작하면서도 외면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세상은 이웃에게 관심을 갖거나 하지 않는다. 가족에게도 관심을 갖는 사회가 아니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아주 조금만 고개를 돌리고,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는 것들. 이 영화는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주로 가족과 관련한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그의 대표작을 꼽아 보자면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2013)』 등이 있다. 최근 작으로는 아트인사이트에서도 칼럼으로 다뤄진 적이 있는 『바닷마을 다이어리 (2015)』가 있다. 대체로 그의 시선은 다정하다. 영상은 푸른 빛 보다 노란 빛이 돈다. 이처럼 따뜻한 영상은 다정한 이야기를 해줄 것 같지만, 적어도 『아무도 모른다 (2004)』는 그렇지 않다. 그의 영상은 따뜻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온도를 잴 수 없는 차가움이다. 어른들의 무관심이 방치한 아이들의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부서지는지 영화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네 명의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가 다르다. 아이들의 엄마는 백화점에서 일하며 아이들을 키우지만 그 방식은 전혀 정상적이지 않다. 이사를 갈 때면 짐가방에 숨어 짐처럼 이사를 하고 첫째를 제외한 나머지 세 아이들은 바깥에 나갈 수 없다. 오직 첫째만이 바깥 세상을 드나들 수 있다. 그러나 네 아이 모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이 있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함께 밥을 먹지만 거기까지다.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을 챙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들의 세상은 짐가방 안과 좁은 집안. 그것이 네 아이들의 세계이다. 엄마의 화장이 진해질수록 첫째의 시선은 불안하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가 떠나간다. 그 좁디좁은 세계에 아이들만을 남겨두고. 이제 아이들의 세계는 조금씩 형태를 잡아간다. 그러나 그 세계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다. 스스로를 보호할 줄 모르는 아이들의 세계는 완성되기도 전에 조금씩 부서진다. 영화는 이 세계의 종말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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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이미지)
 

 엄마가 떠나간 집에서 아이들은 살아간다. 엄마가 보내오는 적은 금액의 돈을 쓰고 그저 조용히 숨죽여 엄마를 기다린다. 첫째는 엄마가 보내준 돈을 세며 걱정한다. 돈은 자꾸만 줄어드는데 엄마의 소식은 없다. 계절이 지나고 여름이 되자 더 이상 수돗물은 나오지 않는다. 돈도 없다. 아이들은 페트병을 들고 공원으로 향한다. 그 물을 가지고 여름을 버틴다. 까만 밤이 되면 아이들의 세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가는 여정을 화려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집에 남겨진 아이들을 보여주며 관망한다. 마치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채로 흘러간다. 아이들이 태어난 것도, 아이들의 엄마가 떠나간 것도, 아이들이 남겨진 것도, 끝내는 여동생이 죽는 것도 모른 채로. 비행기를 보고 싶어하던 여동생을 위해 여동생의 시체를 캐리어에 넣어 전철을 타면서도 사람들은 아이들이 누군인지, 왜 캐리어를 들고 있는지 모른다. 그저 그렇게 지나치는 것이다.



2. 손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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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네이버 이미지) 


 피아노를 치는 작은 아이의 손은 연약하다. 붉은 칠을 해도 그 모양은 둥글고 찬란하기만 하다. 엄마가 사라진 아이들의 세계는 놀랍게도 어둡지 않다. 햇빛이 창을 통과해 아이들을 비추면 아이들은 하늘을 나는 천사처럼 빛나고 있을 뿐이다. 무언가를 만들고, 그리고, 먹고, 대화를 하는 존재. 영화는 아이들의 손을 보여준다. 생명력이 느껴지는 손은 무언가를 창조하고 파괴하며 세계가 만들어지고 부서지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 한다. 여동생이 죽었을 때, 여동생의 시체가 든 캐리어를 만지는 첫째의 손을 보여주는 이유 역시 이것이다.

 아기들이 태어나 처음 보는 자신의 신체부위는 손이다. "손"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만나게 되는 첫 만남인 셈이다. 조카가 처음 태어나 집에 왔을 때 나는 작고 연약한 아이의 옆에 앉는 것조차 두려웠다. 일종의 공포였다. 혹여나 내가 아이를 다치게 할까 싶은 공포. 아이의 볼을 쓰다듬던 내 손과 그런 내 손을 잡으려 움직이던 아이의 손이 닿은 순간, 나는 아이의 천진하고 강인한 생명력을 느꼈다. 아이는 단단히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내 손을 통해 나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지 않았던 그 순간이 아직도 선명한 것은 처음으로 타인의 생명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손"은 꽤나 중요한 상징성을 지니기도 한다. 특히나 과거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붉은 선혈 대신에 힘없이 추락하는 손을 보여주면서 죽음을 알렸고, 주인공들의 악수를 통해 긴장감을 불어 넣기도 했으며 때로는 움직임으로써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역시 "손"을 이용해 죽음을 그리고 비극을 알렸으며 마침내 후회를 말했다. 꼼지락 거리며 움직이던 아이의 손이 멈추는 순간 관객은 죽음이라는 비극을 느꼈을 것이고, 동생이 든 캐리어를 만지는 첫째의 손을 통해 외면하던 것들에 대한 후회를 느꼈을 것이다. 아이들의 비극은 모두 우리가 전가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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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네이버 이미지)


 『아무도 모른다 (2004)』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다. "스가모 어린이 방치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영화보다 잔인하고 더욱 비극적이다. 조금만 더 바라보고 듣고 기다렸다면 우리는 아이들의 세계가 붕괴되는 것을 막았을 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자꾸만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일어날 수 있는"이 아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특히나 어린아이의 죽음은 더욱 그렇다. 한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것은 한 세계의 종말과도 같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셀 수 없을 만큼의 세계가 종말을 기다리고 있을 지 모른다. 분명 영화와 같은 비극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무 것도 아닌 내가 타인을 도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비극을 외면하는 것을 다그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아무도 모르는 세계를 아는 것은 한 세계의 멸망을 막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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