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대체로 고리타분하다고 여겨진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우리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스윽 넘기기만 해도 세일 정보, 뉴스 등 새로운 소식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어제의 일, 한 달 전의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그 가치를 잃는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벅차다. 최신 정보를 더 빠르게, 더 많이 습득해야만 하는 경쟁 사회에서 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 없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경쟁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신의 것, 새로운 것만이 어떤 힘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1988은 응답하라1998과 응답하라1994에 이어 최고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1980년대를 회상하는 사람들과 궁금해 하는 사람들로 인해 멜빵과 터틀넥이 다시 유행을 타기 시작했으며 아폴로나 쫀드기같은 옛날 불량식품을 찾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80년대를 살았던 사람은 과거의 향수에 흠뻑 젖어들었고, 그렇지 않았던 사람도 지금과는 다른 과거의 모습을 만끽하며 즐거움을 느꼈다. 이처럼 과거가 가지는 힘은 생각보다 크고 단단하다. 그것이 주는 예상치 못한 감동, 은근한 맛은 새로운 것과는 다른 기쁨을 우리에게 선사하기 때문이다.
응답하라1988은 끝났다. 하지만 드라마 속 세상이 아닌 빌딩숲이 우거진 도심 속에서도 과거가 주는 감동을, 그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세월을 들을 수 있는 곳, 서울레코드
대형 서점 옆에 위치한 대다수의 음반매장들과 달리 종로3가 한복판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서울레코드. 궁서체로 ‘서울레코드’라고 쓰인 빨간 간판은 매장이 꽤 오랜 시간동안 그 자리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서울레코드는 규모가 크지 않은데다가 양 옆으로 여러 상점들과 다닥다닥 붙어있어 별로 눈에 띄지도 않는다. 하지만 서울레코드가 특별한 이유는 그저 가게가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가게 만큼이나 오래된 음반들을 여전히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옛날 음악은 그저 철지난 고물이나 더이상 대중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잡동사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든지 간에 음악은 언제나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멜로디와 색깔을 담아내고 있는 음악은 그 때 그 시절의 추억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첫사랑에 아파할 때 들었던 노래, 실패에 좌절해 들었던 노래, 꿈꾸던 바를 이루고 기쁨에 겨워 듣던 노래는 마치 세월을 들을 수 있는 필름과 같다. 그 때 그 시절에 듣던 음악은 전주를 울리는 순간부터 그 때의 향기, 분위기, 추억을 뿜어낸다. 그래서 서울레코드는 우리를 끌어당길 수밖에 없다. 음악이 담은 세월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그 날의 감정, 은은하게 흩뿌려지는 추억때문에 말이다. 가게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과거를 그리는 사람들은, 과거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은 음악의 흐름을 타고 돌아가고 싶은 그 때로, 가보고 싶은 그 때로 잠시나마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냄새를 풍기는 헌책방
종로, 세종로, 혜화, 보물섬. 네 개 장소의 공통점은 바로 헌책방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 서점도 줄줄이 문을 닫는 마당에 헌책방이, 그것도 심지어 혜화나 종로처럼 번화한 곳에 있으니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위치보다 더 놀라운 것은 서툴고 뒤죽박죽 분류되어있는 책들 사이를 거닐다보면 과거의 시간과 추억을 마주친다는 사실이다. 속지가 노랗게 바란 책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일 년 전, 혹은 십 년 전 그 책을 보았을 과거의 누군가가 책장을 넘기는 모습이 떠올라 묘한 기분이 든다. 운이 좋으면 그 책을 선물했던 이가 받는 이에게 전하는 마음을 만날 수도 있다.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혹은 누군가를 응원하기 위해 써내려갔을 글을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전혀 관련이 없는 우리가 받게 되는 일은 정말 매력적이다. 우리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과거를 훔쳐보는 일은 또 다른 그윽한 맛을 주는 법이니 말이다.
어쩌면 헌책방은 오래되고 값싼 책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과거 수많은 이들의 손때와 눈물자국, 그리고 마음들이 서로에게 의지해 세월의 공간을 만들어나가는 곳이라고 재정의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살포시 먼지가 내려앉은 책장에서 과거의 냄새가 풍기는 그런 곳이라고 말이다.
새로운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새로운 소식이 쏟아지는 세상을 버리고 과거로 회귀하자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우리가 지나온 세월들을, 너무 오래되어 있었는지도 몰랐던 그런 존재가 주는 ‘신선함’을 그 은근한 맛을 한 번 음미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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