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관계=자아+타자
내 인생의 중심에는 늘 내가 있었다. 내 지상 목표는 나만의 자아를 가지는 것이었고, 그것은 진실한 삶의 출발점이었다.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연금술사] 왕의 말, 세계라는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우는 새인 자신을 깨달은 [데미안]의 싱클레어, 내면의 변화에 초점 맞춘 유수의 자기 계발 서들의 공통점은 '개별자인 자아'에 있었다. 내가 나를 알 때 변화는 시작되었다. 이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든 주변이 어떻게 되든 '나'라는 자아만 만들어지면 그 일들은 어려움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반대로 이는 아주 위험한 발언이다. 자아 찾기라는 여정이 끝나기 전까지 이기심은 암묵적으로 허용된다. 공감共感을 필요로 하는 일은 도처에 있지만, 자아自我완성이 제 1목표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세계에서 타자를 밀어내고 관계를 제거해버렸다. 아니, 그러려고 애썼다. 아이러니는 '나만의 자아'를 만드는 과정에서 되려 내가 꿈 꾸는 미래를 달성한 숱한 개인들과 나를 비교하고 절망하며, 몇 안 되는 관계들에 집착을 보였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내 삶에서 '타자'와 '관계'를 배제하는 데 실패했다. 내 지상목표는 애초에 달성 불가능한 것이었던가?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로 나에게 "나만의 자아를 만드는 건 좋은데, 그 방법을 수정해보길" 강력히 권고한다. 모든 것에 값을 매기는 자본주의에서 개성은 존중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확실히 과거에 비해 현재에 개개인 '선택'의 자유가 늘어난 건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동일성의 지옥'이라는 함정을 갖고 있다. 대형마트에 초콜릿을 사러갔다고 해보자. '식품>가공품>과자>해외과자>허쉬>아몬드>1500원'이라는 범주화를 통해 비로소 초콜릿 하나가 내 손에 쥐어진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누구든지 첫 만남을 떠올려보면, 어떤 대화를 했는가? '성별>나이>출신 대학교>학과, 고향>고등학교'로 분류 하고 나서야 그 사람을 만났다는 게 실감난다.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배웠지만 현실적으로 선택하는 폭은 士자 돌림이나 고소득이나 안정적인 직업 군으로, 생각보다 협소하다. 자신의 의지에서 나왔다 여긴 선택이 얼마나 참신하고 독창적인지 자문해본다면 오히려 나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속한 인간일 뿐이다. 카테고리는 주변의 침범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카테고리에 속하면 그대로 살면 되는 거다. 주체성이 결여된 비인간적인 상태가 '나만의 자아'인가?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다. 흔히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칭하듯 '타자'를 몰아낸 '주체'는 '주체'로 존재할 수 없다. '할 수 있을 수 없음'- 즉, 내가 어찌 할 수도 예측 할 수도 없는 절대적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아는 '나만의' 작품이 될 수 있다.
[에로스의 종말]이 '타자'를 환기했다면, 이 우환의 [조응]과 [선으로부터]는 '관계'를 상기시킨다. 그려진 것들은 단순하다. 석채 붓 한 두 획뿐이고 대부분은 비어있다. 획들만 본다면 [조응]은 두 획들이 떨어져있고, [선으로부터]는 홀로 존재한다. 그려진 것들에게서 느껴지는 시간성이라던가 공간성이 있기는 하다. 단숨에 집중해서 그어야 저런 규칙적인 농담이 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 작가는 하루에 3개의 점만 찍어도 '탈진할 것 같다'고 토로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점을 그릴지 골몰한 결과다. 점은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작가가 그만큼 남겨둔 흰 공간은 그려진 것에 가려진 배경이라기보다는 그 것과 동등한 그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작품은 한 획이 아니라 '하얀 빈 공간과 한 획'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조응'이다. 작가는 조응correspondence이 소통communication과 다르다고 말한다. " ‘Communication’이란 뭔가 분명한 것이 뒤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식인데, 이것은 그 자체로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상호간의 이해를 목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며, 답이 있어야 해요. 반면에 ‘Correspondence’라는 것은 서로 의견이 일치된다거나 어떤 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 자체’가 있는 것입니다. "
[선으로부터]에서 푸르게 그어진 저 획이 나라고 생각해보자. 나는 홀로 존재하는가?
누르스름한 공간은 '그려지지 않았음'에도 '그려진'획과의 관계에서 긴장감을 유지한다.
[조응]에서 두 획인 나와 그는 별개로, 이질적으로 존재하는가?
그 사이의 공간이 획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동시에 획과 조화롭게 공존, 즉 '조응'한다.
참고문헌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 지성사, 2015
심은록, 『양의의 예술: 이우환과의 대화 그리고 산책』, 현대문학, 2014
'이우환 다시읽기#3' http://www.artinculture.kr/online/589
'이우환과 모노화-근대주의적 사고로부터의 해방' http://economyplus.chosun.com/special/special_view_past.php?boardName=C22&t_num=8715&img_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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